옥천면 대산 출신

오심재 약수터 인근에 무덤과 비석

 

29일 불멸의 이순신 방영 후 임진 영웅으로 탄생

포탄 안고 전사... 인터넷 연일 정운 이야기

 

 지난 29일 KBS2TV에서 방영된 '불멸의 이순신'에서 시청자들의 마음을 뜨겁게 달군 인물은 녹도만호 정운, 적의 탄환을 맞아 전사했다는 역사적인 사실과는 달리 폭탄을 안고 전사한 것으로 묘사됐다는 논쟁을 떠나 그의 애국충절에 대한 시청자들의 반응은 뜨거운 감동 그 자체였다. 방영이 끝남과 동시에 인터넷에는 정운의 죽음을 놓고 수많은 글들이 올라왔고 드라마 홈페이지에는 그의 공적을 기려 명명한 해군잠수함 정운함의 사진을 올리는 적극적인 네티즌도 있었다.
  불멸의 이순신 방영으로 임진왜란의 또 하나의 영웅으로 떠오른 정운은 해남군 옥천면 대산 출신. 정운의 출생지를 놓고 영암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당시는 옥천면이 영암군 소속 땅이었기에 일정정도는 맞는 말이다.
  불세출의 영웅은 애석한 죽음과 불운한 삶이 어우러졌을 때 더욱 빛을 내 듯 정운도 전쟁터인 바다에서 죽음을 맞이했고 혁혁한 전과에서 불구하고 공신의 직위를 받지 못한 비운의 인물이었다.   
  ◇ 정운장군을 기리기위해 해군이 명명한 정운함.아마 이러한 인물이었기에 수많은 시청자들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었고 당시는 인정받지 못했을지라도 후대에 해군에서 정운함이 만들어지고 그가 전사한 날인 9월1일이 부산시민의 날로 제정되었다는 사실에 시청자들은 또 한번의 감동을 했다는 반응이다. 역사는 결코 위대한 영웅의 발자취를 놓치지 않는다는 역사적 교훈과 더불어 그러한 발자취를 한 시대를 같이 살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 이뤄졌다는 뿌듯함의 반응이었다.
  정운은 1543년 해남군 옥천면 대산에서 태어난다. 하동정씨인 정운은 7세 때 정충보국(貞忠報國)이란 글씨가 쓰여진 집안 대대로 내려온 보검을 들고 전쟁놀이를 했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28세 때 무과에 급제 북방의 오랑캐와 싸웠고 그 후 웅천현감과 제주판관을 거쳐 임진년에 녹도만호(고흥)로 부임한다. 정운장군도 이순신과 마찬가지로 강직한 성격 탓으로 재임중에 상관들과의 알력으로 순탄하게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다가 류성룡의 천거로 임진년에 녹도만호로 임명된다. 왜구가 침입하는 길목인 녹도로 부임한 정운은 군기와 병선을 점검하는 등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고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충무공 이순신과 함께 옥포해전, 당포해전, 한산도 대첩 등에 참전 혁혁한 공을 세운다.    
  ◇ 정운장군 무덤은 삼산의 양촌 저수지에서 오심재 약수터 사이 우측도로변 하동정씨 선산에 있다.정운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좌수사였던 이순신에게 부산으로 진격할 것을 주장한 인물로 유명하다. 임란이 발생하자 경상 우수사였던 원균으로부터 원군을 요청 받은 이순신에게 출병 여부를 놓고 최후로 면담을 요청, 만일 해전에서 재해권을 장악하지 못하면 뒷날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다며 즉각 출전하는 것만이 최선책임을 강조한다.
  정운과의 면담직후 마침내 이순신은 영남해역에 진군할 것을 결심하고 중위장 이순신을 불러 다음날 5월 4일 새벽에 출전 할 것을 명한다.(해남 문화원 편찬 명량대첩 재조명 내용 중 요약).
  정운은 부산해전 중 쫓겨가는 적을 추격하다 몰운대에서 적이 쏜 조총에 맞아 사망한다.
  옥천 대산마을에 있는 정운장군 충신문은 1681년 숙종 7년에 건립되었다. 정운장군이 배향된 충절사는 정운이 죽은 후 다시 맞은 임진년(1652년 효종3년)에 건립되었고 숙종7년인 1681년에 충절사라는 사액이 내려진다. 충절사는 처음 옥천 서원리(충절사라는 서원에서 마을 이름이 유래)에 건립되었다가 어느 시기에 그의 태생지인 옥천면 대산으로 옮겨진다.
  그의 무덤은 삼산면 양촌 저수지에서 오심재 약수터 사이 우측 도로변 산에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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