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의 산실 해리에 석천의 시향이 흐르고

 

가랑비 보슬보슬 안개 낀 산 저물어 가는데/ 저 멀리 수평선 너머로 해넘어 가는구나/ 청풍 부는 문턱에서 높은 난간 의지하고 있으니/주렴에 걷힌 처마 끝에 송화가 떨어지네<고산 15세 봄을 노래함>    해남은 참으로 많은 문인들을 배출한 곳이다. 한시의 대가인 석천임억령과 국문시조의 대가인 고산 윤선도를 비롯해 미암 유희춘과 옥봉 백광훈, 윤두서, 그리고 대흥사를 중심으로 초의선사와 그와 교류한 추사 김정희 다산 정약용 소치 허유까지 강진과 진도 목포 등 해남은 인근지역 문학의 중심지가 됐다.   현대에 와서 서정시인 이동주, 여성주의 작가 고정희, 굳은 기상을 보여준 김남주, 김준태시인, 감성주의 황지우시인이 해남인이고 낙향해 작품활동을 한 김지하와 소설가 황석영이 대표적인 문인들이다.  해남읍은 과히 학문과 문예의 고장, 시의 고장이라 일컬을 수 있다. 언제나 해남을 넉넉히 품어주는 해남의 진산 금강산, 해남 어디서도 한 눈에 쏙 들어오고 그곳에 서면 해남 어디든 다 내려다보이는 눈썹을 닮은 미암바위에 올랐다.  향토사연구회에서 활동하는 민부삼씨가 해남 학문의 시대를 연 금남 최부가 살았던 금강아파트 뒤쪽 부춘동과 그의 사위인 유계린이 살았고 미암 유희춘이 태어났으며 석천임억령이 태어난 미암아파트 인근, 귤정윤구가 자리를 잡은 보람빌라를 일일이 가르키며 설명한다.   미암바위 아래로 깊은 골이 있는데 이곳이 소룡골이다. 이 소룡골 좌우에서 흘러내린 물이 모이는 곳, 등대원 후문 하천가에 곡구당이 있었다. 호남읍지에는 이곳을 형제당이라 했는데 정언홍과 언식 형제가 이곳에 기거했다고 기록돼있다.   석천은 /서해의 배가 세우를 따라서 오고/〈생략〉 이우당 중창을 열고 본다고 했으며 옥봉 백광운도/곡구 좋은 정자마루에 문을 마주하여 그대를 생각하니 라고 시작한 시를 지은 것을 미루어 이곳에 석천을 비롯한 수많은 이들이 드나들었을 것이다.  정언홍 언식 형제는 늦게 1567년 등과해 석천에게 기쁨을 줬다. 언식은 석천이 별세하자 석천선생시집을 목각으로 간행했는데 현재 호남 최고의 문집으로 여겨지며 고려대에 소장돼 있다.  미암바위에서 내려와 체육공원에서 등대원쪽으로 길을 잡아 등대원 후문으로 나서면 지금은 흔적도 없는 당시 곡구당을 그려볼 뿐이다.   곡구당에서 다시 등대원으로 올라 정문으로 나서면 미암아파트 일대가 미암 유희춘과 석천 임억령이 태어난 곳이다. 미암바위에서 호를 따온 미암 유희춘은 불타버린 선조실록을 다시 쓰는데 큰 역할을 한 미암일기로 유명한 문장가였다. 그의 아버지 유계린은 금남 최부의 사위이자 문도였으며 최부의 학풍은 미암에게로 이어져 하서 김인후와 함께 호남지방의 학풍으로 조성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 인근에서 태어난 석천 임억령은 최부에게 수학한 숙부 임우리에게 학문을 배워 중종 11년에 출사해 기묘사화와 을사사화를 겪고 해남으로 내려와 문학과 후학양성에 몰두 했다. ◇ 곡구당과 석천·미암 거주지. (등대원과 미암아파트 일대) 잘 있거라 한강수야/조용히 흘러 물결 일구지마라/외로운 배 일찍 메는 게 마땅하니/밤새풍랑이 많을 것 같다/ 명종이 즉위하고 을사사화가 일어날 것을 예측한 석천은 동생 백령의 사화에 참여해 달라는 청에 이 시를 지어주고 해남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마산면 장촌리 아침재 인근에 마포별업을 세우고 후학을 양성했는데 이곳에는 제봉 고경명이 15세부터 출입했고, 선조 14년 동안 제상을 지낸 박순과 그의 종형 박민중, 향시·중시에 장원한 송천 양응정과 그의 문하인 정철, 백광훈, 최경창, 박광전, 최경회 등이 이곳을 출입했다. 또한 기대승, 고경명, 이후백, 취죽헌 박백응 중응형제, 임발영, 정언홍 언식형제, 귤정윤구의 아들 윤홍중, 의중 형제, 여흥민씨 민구, 정운 등등 지방의 명문자제들은 대부분 마포별업을 출입하며 임억령에게 배웠다.  아침재의 전설은 수없이 많은 이들이 이곳을 넘나들던 이때부터 연유된 것이 아닐까. 임억령은 하서 김인후, 퇴계 이황, 서산대사 휴정 등과 교류 했다.  1553년 석천은 동부승지를 제수받고 퇴계를 만나는데 퇴계는 유학에 심취해 영남의 도학을 이뤘고 석천은 문학에 심취해 호남에 문학을 이뤄 양대 산맥을 형성했다. 또 같은 해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해 율곡 이이를 만나는데 율곡 이이는 /석천은 옛 은사라/휘두르는 붓 끝에 풍우가 인다오…/흥이 나면 종이 백장을 써치우고/잠깐새 시는 권질을 이룬다오/소지같은 재주 부끄럽기만 하여/마루와 방을 엿보지도 못하오/ 한자리에 가르침을 받으니/동시대에 난 것이 얼마나 다행이오/평생에 무릎 꿇어본 적이 없건만/오늘에야 영공 앞에 굽히나이다/ 라는 시로 그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석천은 한시뿐만 아니라 국문시가에서 쌍벽을 이룬 송강 정철과 고산 윤선도에게 영향을 줬지만 해남에서는 그의 문학적인 자취를 발굴하고 기리는 작업이 더뎌 아쉬움을 주고 있다.  그곳에서 길을 나서 해남천변 다우아파트와 보람빌라 사이가 귤정 윤구가 태어났던 곳을 찾았다. 민인홍씨 자택에는 그 당시 것으로 추정되는 우물터가 남아 있어 고증이 필요하다. 귤정 윤구는 금남 최부에게서 배운 아버지 윤효정에게 영향을 받았으며 석천과는 일년 차이로 태어났다. 윤구는 일찍이 문과에 급제했지만 관직을 버리고 낙향해 후학을 가르치는데 힘썼다. 석천과 윤구는 서로 두터운 교분을 나누었다.    석천집서를 쓴 윤행의 손자 귤옥 윤광계는 600여수의 시를 지어 전하고 있는데 귤옥이란 호를 쓴 것으로 보아 해리에서 난 것을 추정된다.  어초은 윤효정과 귤정 윤구가 벼슬을 마다하고 후학 양성에 기울인 공이 국문시조의 대가 윤선도와 윤두서에 이르러 꽃을 피운 것이다.   ◇ 귤정 윤구 거주지. (보람빌라 일대)  해남천을 따라 해남읍교회 옆 수성노인당을 찾았다. 지금은 노인당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마을유래지에 따르면 관서재라 표기돼 있다. 관서재는 해남 학문의 시대를 연 금남 최부가 후학을 가르쳤던 곳이다. 이곳에서 해남의 학문이 싹이 텄는데 어초은 윤효정과 임우리, 유계린 등이 수학한 곳이다.   귤정 윤구와 고산윤선도, 석천 임억령, 미암 유희춘 등이 그의 영향을 받았으며 해남인을 중심으로 호남의 한 학맥을 형성하는데 기여해 실제로 해남의 학문시대를 연 장본인다. 문서상이나 구전으로는 이곳이 관서재여서 고증을 통해 복원, 문화재로 지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   국문학의 대가인 고산이 화려하게 조명을 받는 것에 비춰보면 그에 버금가는 석천 임억령은 해남에서 조명되거나 발굴 작업이 안돼 아쉬움을 주고 있다.  해남읍 곳곳에 남아 있는 이들의 자취를 복원하고 안내판이라도 세워 해남 후손들과 이곳을 찾는 문인들에게 이정표로 삼게하면 어떨까. 금남 최부와 석천 임억령, 고산 윤선도로 이어지는 해남은 올곧은 정신이 살아있고 남도문화 예술의 중심지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철저한 조명과 연구만이 해남의 정신을 되살려 해남이 나아갈 방향을 알게 하는 지름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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