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해남정씨와 부춘(富春)동 사람들

부춘동(현 해리)은 해남 육현의 고향으로 해남정씨와 직간접적으로 통혼한 이들이 이곳에 거처를 정하면서 학문과 문학의 중심지가 됐다.

 해남현 동문 밖 금강산 석봉 아래 위치한 부춘동은 지금의 해리로 해남정(鄭)씨가 기거했던 곳이다.
  15세기 해남 제1의 재지사족으로 성장한 해남정씨와 통혼관계를 맺은 다섯 성씨도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나주인 탐진최씨 최부, 강진인 해남윤씨 윤효정, 이속가, 여흥민씨 민중건, 영암인 선산임씨 임수 등이 그들이며 그들과 통혼관계를 맺은 무안박씨, 선산유씨 등이 모두 이곳 부춘동에서 기거했다.
  지금 해리 금강골 해촌서원에는 해남육현이 모셔져 있는데 그들은 금남 최부 귤정공 윤구 미암 유희춘 석천 임억령 취죽헌 박백응 고산 윤선도다.
  최부는 사람파의 영수 김종직의 문인으로 해남정씨와 결혼해 처향인 해남으로 거처를 옮겨 해남의 학문적인 구심이 됐다.
  최부는 동국통감 편찬에 참여했고 중국표류기인 표해록을 기록했으며, 무오사화로 참형된 후 중종 때 승정원 도승지로 추증됐다.
  최부는 윤효정 임우리 유계린을 수제자로 삼았고 이들은 호남학맥 중 한 파를 형성했으며 해남을 문헌지방으로 만들었다. 최부는 선산유씨 유계린을 사위로 맞아 유성춘과 유희춘을 배출한다.
 최부는 해리에 거주했으나 그의 후손들은 마산면 상등리로 거처를 옮긴다.
  귤정공 윤구는 어초은 윤효정의 아들이다. 윤효정은 최부에게 수학했으며 최부와는 사촌동서간이다. 윤효정은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출사하지 않고 구 형 행 복 등 그의 자식들에게 학문을 물려주었는데 그중 귤정공 윤구는 중종 때 교리에 올랐으나 기묘사화로 화를 입고 삼산면 나범리에 유배됐다. 그는 최산두 유성춘과 함께 호남 3걸로 불리며 뛰어난 문장을 자랑했다.
  해남윤씨는 윤효정 이후 5대에 걸쳐 문과 9명 무과 15명의 급제자와 34명의 관직 진출자를 내면서 해남정씨처럼 해남을 기반으로 인근지역 광산이씨, 나주나씨, 반남박씨, 여산송씨 등과 통혼해 호남으로 세력을 넓혀갔다.
  또한 윤효정의 손자대에 미암 유희춘과 석천 임억령과도 통혼을 맺어 해남정씨를 통해 맺어진 통혼관계가 3∼4대 후에 해남윤씨를 통해 다시 재결합했다. 해남윤씨는 이후 연동으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석천 임억령은 해남정씨와 통혼을 한 임수의 손자다. 임수는 우원 우형 우리 우정 4형제를 두었는데 이들 모두 해리서 태어났다. 그중 우형의 가계가 가장 번성했는데 해남육현인 석천 임억령을 비롯해 천령 만령  백령 구령 등 5형제 중 억령 백령 구령이 관직에 진출했다.
  이들은 장흥임씨 임희성, 무안박씨 박안, 담양 김성원, 광산 고맹영, 영암 최경창 등과 통혼을 했다.
  석천임억령은 박정의 문인인데 박정은 김종직의 문하로 임억령 역시 김종직의 학맥을 이어 받았으며 문학쪽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였다. 그는 담양 성산 식영정과  해남의 마산면 장촌리에 마포별업을 세우고 제자들을 길렀는데 제봉 고경명, 취죽헌 박백응, 정언홍, 예양군 임발영, 윤홍준·의중 형제, 민구, 정운 등이다. 임씨들은 마산면 장촌리, 영암, 경기, 충청으로 이거했다.
  미암 유희춘은 최부의 외손자다. 그의 아버지는 순천인 유계린(선산 유씨)으로 최부가 무오사화로 유배되자 순천으로 돌아가 김굉필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그의 아들인 성춘은 중종 때 개혁정치에 참여했다가 28세에 요절했으며 희춘은 별시문과에 급제해 관직에 진출했으나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돼 19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다가 선조 때 석방됐다. 그후 교리 부제학 전라관찰사 등을 역임했으며 을사명현으로 선조 때 크게 문명을 떨치며 호남지방의 학풍을 주도했다.
  성춘의 후손은 장성으로, 희춘의 후손은 담양으로 이거해 해남과 관계가 소원해졌으며 희춘은 해남윤씨를 사위로, 장성의 하서 김인후의 딸은 며느리로 맞았다.
  취죽헌 박백응은 선산임씨와 통혼한 무안박씨 박안의 손으로 석천 임억령의 생질이며 그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박백응은 진사로 효성과 학문이 뛰어나 진안 현감을 지냈고 동생 중응은 시에 능했다.
해남육현 중 뛰어난 문장을 자랑한 석천 임억령은 마산면 장촌리에 마포별업을 세우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마산면 장촌리 석천임억령의 묘.  

해남정씨 이후 해남을 대표하는 성씨로 해남윤씨와 더불어 여흥민씨가 있다. 해남정씨와 혼인한 여흥민씨 민중건은 오(鰲)와 구(龜) 그리고 열녀를 자녀로 뒀다. 구는 석천임억령에게 수학했으며 1549년 해남향교 대성전 중수시에 실질적인 책임자인 감역을 담당했으며 이후 16∼17세기에 해남 향교와 밀접한 관련을 맺으면서 재지사족으로 자리 잡았다.
  여흥민씨는 보은이씨, 원주이씨, 해남윤씨, 김해김씨, 언양김씨, 무안박씨, 장흥임씨, 순천김씨 등 해남을 근거로 한 성씨들과 혼인관계를 맺으며 해남지방에서 해남윤씨와 함께 큰 성씨를 이뤘다. 여흥민씨는 마산면 화내리로 거처를 옮겼다.
 16세기 이후에는 해남정씨와 통혼관계를 맺은 8개 성씨 이외에 사화를 피해 해남으로 낙남한 보은이씨, 원주이씨, 순천김씨, 김해김씨, 선신김씨, 동복오씨, 연안이씨, 충주한씨 등이 해남의 다수성씨로 자리잡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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