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올'은 춘추전국시대 초나라 역사책 제목이지만 중국 전설에는 난폭하기 이를 데 없는 상상의 동물로 나온다. 철학자 김용옥은 고전에서 착안했는지 모르겠지만 박사학위 논문을 쓸 때 처음으로 '도올'이라는 호를 사용했다.

김용옥은 호를 도올이라 지은 배경을 두고 '돌'이 뜻하는 '돌대가리'에서 비롯됐다고 했다. 돌을 느리게 발음하면 도올이고, 도올을 빠르게 발음하면 돌이다. 6남매 가운데 막내인 그는 어릴 때 형들에게서 돌대가리라는 놀림을 많이 받았다고 했다. 이해가 느리고 아둔하게 비친 모양이지만, 조카와 동년배인 집안 내력으로 남들보다 2년 일찍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에 입학한 사정도 숨어있다. 어릴 때 2년 차는 이해력에서 크게 차이 날 수밖에 없다.

도올 김용옥에겐 '튀고 난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이름 앞에 으레 철학자가 접두어로 붙지만 교수, 작가, 평론가, 한의사, 신문기자, 시나리오 작가, 연극인, 미술인 등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다방면에서 두각을 보인다. 지금은 유튜브 채널인 '도올TV'를 운영하며 튀는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그런 그가 얼마 전 해남군에 고향사랑기부금으로 200만원을 기탁했다. 자신의 뿌리라고 여긴 해남을 향한 수구초심(首丘初心)이 작용했을 터이다. 도올과 해남의 인연은 증조부로 거슬러 올라간다. 증조부 김중현(원래 이름은 김성택)은 창덕궁 수문장(하급 군졸) 당시 임오군란(1882년)이 발생하자 명성황후(고종 왕비)를 등에 업고 피신시킨다. 이 공로로 흥양(고흥) 감목관(군마를 기르던 흥양목장 관장)에 제수되고 1886년 해남현감으로 부임한다. 시쳇말로 인생 역전의 잭팟을 터뜨린 인물이다. 김중현의 아호는 '해남에 은거하다'는 뜻의 해은(海隱)으로, 5년간 선정을 베풀어 현산 월송, 해남읍 서림, 문내 우수영에 공적비가 남아있다. 그는 충북 제천에 있던 아버지(김재완)의 묘를 북평 남창으로 이장하고 어머니가 별세하자 합장한다. 종2품까지 오른 김중현도 옥천에 묻혔다.

김중현은 해남읍 연동에 살면서 아들 김영학을 해남윤씨 집안의 딸(도올의 조모)과 결혼시킨다. 김영학은 계곡 성진(별진)에 터를 잡았으며, 그의 둘째 아들인 김치수가 곧 도올의 부친이다. 도올은 어렸을 적 어머니가 3년간 살았던 성진 얘기를 숱하게 들었다고 했다. 도올의 부친이 학업을 위해 서울로 떠나면서 3대에 걸친 해남과의 인연도 막을 내린다.

도올은 충남 천안에서 태어났지만 고조부모, 증조부모, 조부모의 묘가 있는 해남이 자신의 뿌리라고 말한다. 해남윤씨인 조모의 피를 이어받아서인지 해남에 대한 애착이 남다르기도 하다.

해남을 찾아 특강을 할 때면 해은서원을 세우고 싶다는 뜻을 비치기도 했다. 대신 2020년 1월 계곡 흑석산 자연휴양림에서 도내 고교생 63명이 참여한 4박 5일 일정의 전남인재학당(도올학당)을 한 차례 열었다. 인문학 캠프인 도올학당은 이후 코로나19에 묻혀 더 이상 열리지 못하고 있다. 도올은 2021년 10월 해남에서 출발한 농산어촌개벽대행진의 일환으로 열린 해남민회(民會)에서 도올학당의 아쉬움도 털어놓았다. 정작 해남에서 단 한 명만 참여했다는 것이다. 자신의 뿌리로 여긴 해남에서 푸대접을 받는 기분이었을까.

도올이 태어나거나 살지도 않았던 해남을 고향으로 생각하고 고향사랑기부금을 냈다는 자체에 의미가 있다. 새해 출발을 알린 고향사랑기부제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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