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미례(독립영화감독)

 
 

아버지는 농민신문을 구독하셨다. 2주에 한 번씩 배달되는 농민신문을 나는 설레며 기다렸다. '전설의 고향'을 연상하게 하는 옛이야기가 연재되었기 때문이다. 어떨 땐 한 번에 끝났지만 긴 이야기는 세 번, 네 번에 걸쳐서 실렸다. 한참 재미있게 전개되던 이야기가 뚝 끊기면서 해당 지면이 '계속'이라는 단어로 끝을 맺으면 궁금해서 어쩔 줄을 몰라 하다가 다음 호를 애타게 기다렸다.

열세 살에 떠나온 고향 해남. 중랑천변에서 9년을 살았고, 경기도 광명에서 8년, 서울 봉천동에서 10년, 그리고 강화에서 12년을 살았다. 해남에서 살던 13년 동안은 한 번도 이사를 하지 않아 나는 늘 떠나는 사람들을 부러워했다. 오빠와 언니들이 도시로 유학을 떠나고 가게집 아이였던 나는 신작로 옆 가게에서 늘 떠나는 버스를 보며 도시를 동경했다. 첩첩이 쌓인 산들을 보며 저 산 너머에 있을 도시, 명절 때만 되면 다니러 오는 동네 언니 오빠들을 멋쟁이로 만들어주는 그 도시 서울에 너무나 가고 싶었다.

해남이 어떤 곳인지는 떠난 후에 알았다. 20대에 다녔던 잡지사의 편집장은 내 고향 얘기를 듣더니 깜짝 놀라며 "내가 해남을 얼마나 좋아하는데. 내 앞에서 그런 말하지 말아 줘"하는 농담을 던졌다. 글쓰기 모임을 하던 사람들은 때가 되면 고정희 시인의 자취를 따라 해남을 다녀왔고 해남사람인 나를 부러워했다. 해남은 그런 곳인가?

나는 해남을 몰랐다. 아니 지금도 잘 모른다. 땅끝마을은 아직도 가보지 못했고 벌초나 시제에 참여하는 가족을 따라가서 고향마을을 일정에 쫓기며 둘러보는 정도이다. 내가 다녔던 학교가, 곤충채집을 위해 쏘다녔던 들판이, 그렇게나 작고 좁다는 사실에 놀라고 남아있는 이웃들이 많지 않다는 사실에 쓸쓸해진다.

그래도 어떤 풍경이나 사람을 만났는데 알 수 없는 친근감과 평온함을 느낄 때면 그 연원이 고향 해남에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대학 시절, 너무 힘들어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 때 마지막에 힘을 내서 찾아간 곳은 해남이었다. 20대에 다큐멘터리 작업을 위해 갔던 동강변 제장마을 사람들과 금방 어울릴 수 있었던 것도 해남 때문이었다. 2014년 네 번째 영화 '아이들' 상영을 위해 인도의 뉴델리를 찾았을 때 따뜻하게 배려해주었던 인도문화원의 원장이 해남사람이었다. 행사 주최자와 초청감독으로 만난 사무적인 자리였지만 고향에 대한 기억을 나누며 우리는 금방 웃음을 주고받았다. 고향 해남은 내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다.

나는 여성, 장애, 가난, 돌봄을 키워드로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사람이다. 2010년에 남편의 발령으로 강화를 찾았을 때 시골 가게를 보았다. 깔끔한 마트와 편의점이 있는 그 마을에 간판 없는 작은 가게가 있었다. 그 가게를 지나가며 어린 시절 나를 생각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농사일로 바쁜 엄마와 언니를 대신해 나는 늘 가게를 지켰다. 고향 마을에도 슈퍼가 생겨났고 우리 가게를 찾는 손님은 서서히 줄었다. 나는 그 가게에 앉아서 고갯길을 넘어가는 버스의 뒤꽁무니를 보며 마음에 차오르는 울음 같은 것을 견뎠다. 간판이 없는 강화의 작은 가게를 보며 생각했다. 이 가게에는 어떤 아이가 있을까. 나는 그렇게 낯선 동네에 마음을 붙여가며 '아이들' 두 번째 영화 '따뜻한 손길'을 제작 중이다.

한 해 동안 글을 쓰는 나를 위해 편집국장이 해남신문을 보내주었다. 해남신문을 꼼꼼히 읽어보다가 어린 시절에 애타게 기다렸던 농민신문 생각이 났다. 대부분 기사를 이해하지 못하는 어린 나였지만 내가 좋아하는 그 한 면을 보기 위해 나는 늘 농민신문을 기다렸다. 그때의 나처럼 해남신문을 기다리는 누군가를 그려본다. 그리고 그 누군가가 나의 글을 기다리는 상상을 해본다. 그런 글을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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