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주일 이용사가 손님 머리 염색 도구를 들여다보고 있다.
▲ 김주일 이용사가 손님 머리 염색 도구를 들여다보고 있다.
▲ 태극기가 내걸린 이발관.
▲ 태극기가 내걸린 이발관.

"사람 두상에 맞는 최고의 '견적'… 이용도 예술"

중학 중퇴 후 동초 구내 이발소에 머리감기 시작
서울서 귀향해 마을 어르신 사랑방 역할도 톡톡
이용은 점차 사양길… 면 단위 1~2개만 명맥 이어

 

삼산천 어성교를 지나 조금 가다 보면 원진마을 초입에 허름한 농협 창고가 눈에 들어온다. 부속 창고 한 켠에는 태극기가 꽂혀있고 번듯한 간판도 없이 건물 외벽의 벗겨진 페인트에 묻힌 '이발관'이란 글자가 쓰여 있다.

김주일(79) 이용사는 43살이던 1987년 귀향해 이곳 이발관에서 한때 중단한 적도 있지만 줄곧 주민들의 머리를 손질해왔다. 주일인 일요일을 빼고 매일 아침 7시 30분이면 이발관에 나와 해질녘까지 하루 10명 정도 손님을 반겼다. 평생 다른 사람의 머리를 깎고 다듬는 일에 매달려온 그는 세밑인 지난달 31일을 마지막으로 천직에서 물러났다.

"나이가 먹어 가면서 건강이 허락하지 않아 평생 업으로 삼아온 이용 일을 내려놨습니다. 아쉽기는 하지만 후배가 이발관을 잇게 되어 다행입니다. 후임자가 잘 해내길 바랄 뿐입니다."

김 어르신이 이용과 인연을 맺은 것은 10대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해남중 2학년에 다닐 무렵 아버지가 빚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다. 학교를 그만두고 해남동초 구내 이발소에서 머리 감는 일부터 시작했다. 그러다가 21살 되던 1965년 두 번째 도전 끝에 이용사 자격증을 따 고향에서 이발소를 차렸다. 군에서 전역한 후 결혼해 부산으로 떠났다. 그곳에서 이발소를 잠시 운영하다 서울로 올라가 터를 잡았다.

70년대 중반 젊은 층 사이에 장발이 유행했다. 이게 이용업계에 타격으로 다가왔다.

"장발이 유행하면서 손님이 확 줄어드는 바람에 이용업계 경기가 엉망이어서 돈 벌러 중동으로 떠났습니다."

당시 중동에는 건설 붐이 일었다. 쿠웨이트, 사우디아라비아, 이라크에서 4년 8개월 일하고 83년 귀국했다. 다시 서울 정릉에서 이발소를 4년 정도 운영하다가 홀로 사는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고향으로 내려왔다.

귀향했던 87년, 농협 빈 창고에서 비료 판매도 하며 이용 일도 다시 시작했다. 10남매의 장남으로 이발소를 운영해 번 돈으로 동생 뒷바라지를 하는 아버지 역할도 했다. 이발소가 바쁠 때는 아내(김숙자·76)가 면도 등을 거들기도 했다.

2.5평 크기에 의자 2개만 달랑 있는 조그만 원진이발관은 그동안 동네 어르신들의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했다. 꼼꼼한 이발 솜씨에 원진마을이나 삼산면 소재지는 물론 해남읍, 화산서도 찾아왔다.

"이발관은 머리만 깎는 곳이 아니고 동네 어른들이 모여 이런저런 세상 돌아가는 얘기나 집안 소소한 일을 털어놓은 사랑방입니다. 2년 전 어느 날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동네 어르신이 혼자 있다가 급체로 큰일 날뻔한 적도 있었습니다. 사이다 먹이고 119 부르고 화장실로 데려가 토하게 했는데 나 아니면 돌아가셨을 거요."

김 어르신은 고향에서 농사를 짓고 소도 키우며 25년, 타향에서 10년, 줄잡아 35년 정도 이용 일을 했다. 이용협회 해남군지부장을 3년간 지냈고, 지금은 원진마을 노인회장을 맡아 마을 일도 챙기고 있다.

이발관은 이발소, 이용원, 이용소 등 엇비슷한 이름으로 다양하게 불린다. 예전에는 단발머리 등 여성의 머리도 손질했지만 지금은 역전됐다. 젊은 층의 남성은 주로 미용실을 찾는다. 이발소가 사양길에 접어들면서 시골에서 점차 사라져간다.

해남에는 지금 55곳의 이발소가 영업하고 있다. 이 가운데 절반 가까운 26곳이 읍에 몰려있고 면에는 인구가 상대적으로 많은 송지와 문내를 제외하고는 1~2곳에 불과하다. 화산에는 단 한 곳도 없다. 4곳은 80대 이용사가 운영할 정도로 고령화되고 있다.

"사람마다 머리 형태가 달라 가장 알맞고 균형 있게 '견적'을 빼야 합니다. 이발도 일종의 예술입니다. 요즘엔 이용 일을 배우려는 젊은이가 줄어들어 걱정도 됩니다."

그러면서 자기 자랑도 했다.

"나는 애국자요. 김신조가 남파됐던 68년에 군 복무 했지, 중동에 가서 달러 벌었지, 뉴질랜드로 이민 간 외손자 둘에게 한국 군대에 입대하라 했지. 지금 둘 다 군 복무 중이고."

젊은 시절 20㎏짜리 비료 7포대를 한꺼번에 들어 경운기에 실었다는 김 어르신. 갈비뼈가 다쳤을 때도 이용 일 때문에 입원도 제대로 못했다고 한다.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니 한편으로 뿌듯합니다. 이젠 쉬면서 병원도 다니며 건강을 챙기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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