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호랑이의 해'인 2022년 임인년(壬寅年)이 엊그제 출발을 알리는가 싶더니 어느덧 끝자락에 섰다. 12월 달력이 어서 오란 듯 7일을 꽉 채운 마지막 5주째를 가리킨다.

연말이 되면 우리에게 떼어놓을 수 없는 문화가 김장 담그기이다. 김치와 김장문화는 유네스코 인류 무형유산으로 등재될 정도로 세계에서 독특하고 그 가치를 내세울 만한 전래의 값진 자산이다. 김장은 저물어가는 한 해를 알리고 마지막도 함께 한다. 11월 중순 추운 북쪽 지방에서 시작되는 김장은 한 달간 시나브로 남진(南進)하다 12월 말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해남에서 김장도 이젠 대장정의 끝물에 접어들었다.

김장 담그기는 한 해의 끝자락에서 다가오는 한 해를 준비하는 집안의 큰 행사이다. 5~6년 전부터 부모님과 남매 등 5가족이 함께하는 집안 김장 행사의 일원으로 합류했다. 그러면서 몇 가지의 깨달음도 자연스레 찾아왔다. 마치 득도(得道)한 듯 '깨달음'이라는 거창한 표현을 끄집어낸 데는 체득(體得)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고 정주영 회장이 생전 입에 달고 살았다는 "임자, 해봤어?"라는 말뜻이 어렴풋이 다가오기도 했다.

김장은 몸소 해보지 않고는 얼마나 고된 노동인지, 얼마나 정성이 깃들어 있는지 '감'이 잘 잡히지 않는다. 김장 준비는 9월 고추를 말리는 일부터 시작된다. 마늘은 일일이 까서 다져야 한다. 11월 말 젓갈을 마련하면 일단 중장기(?) 준비가 끝난다. 어머니의 젓갈 선택은 유별나다. 처음 신안을 찾았다가 전북 부안 곰소를 거쳐 몇 해 전부터 충남 강경을 고집한다. 내륙의 조그마한 강경읍에는 어림잡아 150곳이 넘는 젓갈 가게가 장사진을 친다. 전국에 유통되는 젓갈의 60%가 강경을 거친다고 하니 가히 '젓갈 도시'라고 할 만하다. 금강 하구의 강경은 오래전 포구가 사라져 해산물 집산지의 명성은 퇴색했지만 발달된 염장기술이 오늘의 젓갈로 이어졌다. 기사 노릇을 하면서 새우가 잡히는 시기(음력)에 따라 오젓, 육젓, 추젓이라 불리는 것도 알았다. 육젓은 크고 연한 살이 많아 최상품으로 여긴다. 올해 육젓은 1㎏에 7만 원이나 달라니 엄두를 못 내고 오젓(3만 원)으로 장만했다.

김장하는 날 앞서 이틀간은 과일, 무, 양파, 쪽파, 대파, 청각, 생각 등 갖은 양념 재료를 준비하고 이를 큰 다라이(대야)에 넣어 섞고 또 섞으면 김장 준비는 마무리된다. 재료를 섞는 일을 하다 보면 허리가 나갈 정도로 아프고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이런 고된 일임을 알지도 못했으니…. 올해 해남 절임배추는 속이 꽉 차고 아삭한 식감에 가족 모두가 만족감을 감추지 않았다. 배추를 한참 버무리다 보면 또다시 허리가 끊어질 것처럼 아파온다. 갓 담은 김치에 삶은 돼지고기를 얹어 한 끼를 마치면 비로소 김장 담그기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우리의 김장문화에는 한 포기라도 더 담가서 이웃들과 나누는 정이 담겨 있다. 김장을 하지 않는 이웃이나 친척에게 김장김치 한두 통을 선물하기도 한다. 수고로움이 가득 밴 김장김치는 무엇에 비할 바 없는 값진 선물이다. 이게 마지막 깨달음이다.

올해도 해남에서는 각종 사회단체와 종교단체, 부녀회, 조합 등이 나서서 김장나눔 행사를 갖고 있다. 으레 하는 연말 행사 정도로 비쳐질 수 있는 김장나눔은 '반 식량'의 가치를 넘어 한겨울의 추위를 녹이는 따스함이 묻어 있다. '살 만한 세상'의 버팀목이기도 하다. '기쁨을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된다'는 말이 새삼 떠오르는 세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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