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순(커커필드-학교해남 대표)

 
 

잘 사는 방법에 대한 어른들의 다양한 조언을 만나왔다. 그것은 삶을 대하는 태도를 빗대어 '농사를 지으며 자연과 잘 지내며 이해한 이치를 통해서 삶을 마주하길 바란다', '미래를 위한 투자', '자식 농사', '학력', '부를 통한 성공' 등 삶에 필요한 도구를 갖출 수 있는 구체적인 조언들이다. 물론 인생 선배들의 조언 중에는 각자의 추구하는 가치나 삶의 방식에 따라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거나 실로 커다란 간극이 있기 마련이다.

그 간극을 좁히려면 '잘 사는 방법'을 논하기에 앞서 '잘 사는 것'에 대한 정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잘 삶'에는 가치와 방식과 태도, 그에 따른 구체적인 장소와 사람 그리고 다양한 도구들이 작동할 것이다. 또한, 함께 더불어 사는 '삶'의 여정 안에서 우리가 만나고 경험하는 것에 대한 적절한 선택과 진심 그리고 신뢰도 필요하다.

우리가 선택할 수 없는 탄생과 죽음 이외 오롯이 우리의 의지로 채울 수 있는 '삶의 여정', 그것은 봄, 여름, 가을, 겨울처럼 우리네 찬란한 일생은 다음 생의 사계절을 위한 기본이며 본보기로 오래도록 이어가게 될 것이다. 결국 잘 사는 것은 잘 죽을 수 있는 여정이기도 하며 '잘 살고 죽기 위해' 우리가 오랫동안 이루어온 문화가 후세대에 앞선 이들의 지혜로 전달될 것이다.

필자는 해남에 정착하기 시작할 무렵 몇몇 집을 방문한 경험이 있다. 대체로 돌아가신 부모님의 집이거나 요양원 또는 가족 곁으로 거처를 옮긴 후의 집이었다. 살림도 이부자리도 옷가지도 주인의 마지막 순간을 기록하듯 빈집의 시간은 멈춰져 있었다. 살던 이의 공간과 주변은 아직 작별 인사를 못 한 채 방치된 상태였다. 떠난 이는 말이 없다지만 남아있는 이들의 배려가 아쉬운 부분이다. 단란했던 가족들의 사진, 옷가지 선물, 일상생활을 이어나갈 만큼의 약봉지들, 식기들이 가지런하다. 집 텃밭도 마지막 순간까지 부지런했겠다.

이 집의 오랜 주인이었던 할머니는 한 주에 한 번 장을 보러 버스를 탔고 집 주변과 정갈한 안마당을 유지했다. 누구나의 공간이 단아한 건 아니다. 고령에도 가능한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상생활을 유지하며 그날도 여느 날과 같이 아무 탈 없이 보낸 하루에 대한 감사와 자식들의 안부를 전해 듣고 편안히 잠자리에 들었을 거다. 타인에게서 찾을 아쉬움 이전에 그녀 스스로가 지킨 당당함과 자존감이 경이로웠다.

자신의 존엄함을 지킨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것은 잘사는 것과 잘 죽는다는 것에 대한 중요한 질문에 맞닿아 있다.

얼마 후 몇몇 마을의 고령 주민들을 만난 적이 있다. 늘어가는 빈집으로 가득한 마을은 전염병에 걸린 듯이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떠난 이들의 자녀들은 유산상속 분배의 문제로, 소유에 성공한 자녀들은 수십 년 후의 은신처로 정한 뒤 '방치'를 시작했다. 잘 사는 것을 위한 방법에는 더불어 사는 것도 속하리라. 나의 고향 내 부모님의 벗들에게 상실의 아픔에 '방치되어 죽어가는 집'까지 더 해주고 있다.

어느 시인과의 대화에선 장례문화의 자본주의화를 말하기도 했다. 병원이나 요양원으로 옮겨진 후 그리운 집은 머릿속 기억만으로 남은 채 얼마 후, 장례식장에서 똑같은 풍경 안의 고인들을 마주한다. 어디서 왔는지 무엇을 했는지 어떤 삶의 과정을 거쳐 오늘날에 이르렀을지는 알 수가 없다. 고인의 삶의 흔적이 남아있는 집에서 멀리 온 이 똑같은 공간에서 똑같은 음식과 절차를 겪으며 현대의 장례를 치른다. 고인의 자녀들 생각과는 달리 주변의 남,녀 어른들은 '상여'를 꿈꾼다. 나의 공간, 가족, 친구, 이웃, 지역과의 찬찬하고도 깊은 이별을 원한단다. 죽음 이후의 이별 방법조차 선택할 수 없는 삶이란 것, '잘 사는 것'에 대한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게 한다.

잘 살려는 마음은 삶의 과정 그 자체이며 죽음의 순간에 서로에게 전달될 '내 삶'의 여정이 가족과 이웃과 지역의 남는 이들에게 주는 선한 감동과 실천으로 이어질 교훈이라 할 수 있을까? 기꺼이 살아낸 삶, 무척이나 축하할 일이며 그런 삶의 마무리도 멋진 축제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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