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은희(해담은3차아파트 공동체 대표)

 
 

요즘은 진심으로 사과하는 사람을 보기 어려운 것 같다. 올해 생애 최초로 명함을 갖게 되었다. 해남군 사회적공동체지원센터가 '2022년 전남 마을공동체 활동 지원 사업 지정 마을활동가들'에게 배포했기 때문이다. 마을지원활동가로서 일할 때 유용하다. 이런저런 활동을 하다 보면 좀 더 많은 사람을 만난다. 주민, 마을활동가. 지원센터 직원, 공무원, 군의원 등등. 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많이 배우고 느낀다. 진심으로 사과하는 사람이 되기도 쉽지 않으며 그런 사람도 많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그 중 하나이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활동들에 참여하는 게 스스로를 늘 돌아볼 수 있으니 나쁘지는 않지만 사과에 인색한 이유가 궁금하다.

고개를 숙이는 행위 자체를 패자(루저-loser)의 행동이라고 생각하는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어서 사과에 인색한가? 우리 사회는 일제 강점기와 미군정을 겪으면서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준비 없이 편입되어 경쟁사회 속으로 맨몸으로 내몰렸다. 공동체와 공동체 문화는 소멸되었다. 정월대보름에 너른 들을 뛰어다니며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쥐불놀이도, 명절에 하는 윷놀이도, 강강술래도 사라졌다. 단오에 그네 타다 만나는 성춘향과 이도령도 춘향전에나 나오는 이야기다. 우리는 학교와 학원, 직장과 집만 오가는 시계추의 삶을 살면서 이웃과 공동체라는 개념을 잊고 살아왔다.

일등만 기억되는 사회, 일류만 존중되는 사회, 상위 1%를 위하여 100%가 내달리는 사회 그래서 놀 수도, 놀 곳도 없어서 노는 방법도 잊어버린 채 일만 해야 하는 생존을 위한 경쟁사회로 내몰렸다. 적성과 개성은 무시된 채로 대학진학을 위해 수능 단 하루 한방을 위해서 12년을 경쟁하다 취업, 성과와 승진을 위해서 또 경쟁한다. 우리는 자연과도 경쟁하고 친구와도 경쟁하고 동료와도 경쟁하고 형제자매끼리도 경쟁하면서 살고 있다. 모든 삶이 경쟁으로 매듭지어지는 사회에서는 고개 숙이는 것이 바로 패배로 연결되어 사과에 인색한가?

우리나라 대통령 윤석열도 집권 초기부터 꽤 많은 수식어를 달고 산다. 긍정적 인 의미보다 부정적인 의미를 나타내는 말이 대부분이다. 그 중 하나가 '사과하지 않는', '절대 사과하지 않는'이라는 말이다.

최근에 있었던 해남평생학습관의 인문학 강좌에서 강사는 인문학을 하는 목적이 다른 사람의 입장으로 생각하면서 공감력을 키우는 것이라는 인상 깊은 말을 했다. 그런데 법률이라는 인문학을 평생 다룬 그가 보이는 편파적 공감력(범죄자로의 잠재 가능성을 갖고 있다고 판단되는 국민에게는 사과하지 않는)은 검사라는 직업의 특성인가.

우리는 고마움이나 미안함을 표현할 때 고개를 숙인다. 고개를 숙이는 것은 자기를 낮추는 행위인데 사과를 할 때는 더 깊이 고개를 숙인다. 이는 잘못한 행위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는 의지와 함께 같은 실수를, 잘못을 하지 않겠다는 각오의 무게 값이다. 그런데 다른 사건은 다 제쳐두고라도, 300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한 이태원 참사에 진심으로 고개 숙여 사과하지 않는 대통령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모든 희생자와 유가족, 부상자와 트라우마를 또 겪게 된 대한민국 국민은 진정한 사과를 받기 원한다. 우리는 오로지 국민의 상처받은 마음만을 고려한 사과, 윤석열 정권의 행위를 정당화시키지 않는 사과, 그리고 변명하지 않고 책임을 인정하며 받아들이는 사과를 받아야 한다. 이태원 희생자들을 깊이 애도하며 부상자들의 빠른 쾌유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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