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의 초등학교 역사는 일제 강점기인 1911년 9월 1일 해남동초등(해남공립보통학교)이 개교하면서 시작된다. 사립인 마산 도산학교에서 출발한 미산학교가 읍내 향교로 이전해 공립으로 이름을 바꿔 달고 문을 열었다는 기록을 빌리자면 동초등의 역사는 이보다 오래됐다고 봐야 한다. 동초등은 해남에서 펼쳐진 3·1운동(1919년)의 출발점이자 중심이기도 하다.

현산초등(1918년·달산공립), 우수영초등(1920년·우수영공립)이 동초등의 뒤를 이었다. 우수영초는 1918년 명량의숙으로 개설돼 이듬해 12월 인가를 받은 우수영사립보통학교가 모태이다. 그래서 개교 100주년 행사도 2019년에 가졌다.

1920년대 들어 '제2차 조선교육령'으로 삼면일교제(三面一校制)가 일면일교제로 바뀌면서 해남에는 많은 초등학교가 생기게 된다. 계곡초등(1921년·성진공립)을 시작으로 1922년에 황산초(황산공립), 마산초(마산공립), 북일초(북평사립)가 문을 열고 송지초(1923년·송지공립), 화산초(1924년·화산공립), 해남서초(1925년·대정사립), 옥천초(1926년·옥천공립)가 차례로 뒤를 따르게 된다.

초등학교 명칭은 소학교에서 출발해 일제 강점기에 보통학교-소학교-국민학교로 바뀌는 과정을 밟는다. 1941년 변경된 국민학교라는 이름은 '황국신민(皇國臣民)'이라는 의미인데도 8·15해방 이후 반세기 넘게 유지됐다. 이게 행정편의라고 둘러대지만 위정자들이 일제 잔재 청산에 얼마나 몰인식했는지 단적으로 말해준다. 다른 시각에서 보면 보수(保守)를 넘어 수구(守舊)에 다름 아니다. '보수'의 바탕에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이 깔려있다. 참된 보수는 좋은 옛것은 이어가되 새것을 받아들이는 데도 인색하지 않는다.

초등학교라는 명칭은 광복 51년이 되던 1996년 3월에서야 불리게 된다. 그래서 지금 40살 안팎은 국민학교에 입학해 초등학교를 졸업한 '국·초딩 세대'이다.

올해 황산초와 마산초에 이어 북일초가 다음달 5일 개교 100주년 행사를 갖는다. '100'은 단순히 숫자 이상을 내포한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으니 10번이나 강산이 바뀐 한 세기(世紀)의 세월이다.

100년을 지켜온 초등학교는 이제 새로운 100년을 다짐한다. 이런 기약에도 아이 울음소리가 사라져가는 농촌 현실에서 미래는 암담하다. 북일에서는 올해 9월까지 단 한 명의 출생아도 없다(주민등록 기준). 마산과 옥천은 두 명이다. 마산에서 작년 한 해 태어난 아이는 유일무이했다. 이런 상황에서 '외부 수혈'이 없다면 초등학교 존속 자체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 농촌에서 학교가 사라지면 지역사회도 사라진다. 지역사회가 살아나고 젊어져야 학교도 존속한다. 그러려면 살만한 농촌이어야 한다.

북일초의 개교 100주년 행사는 이런 면에서 남다르게 다가온다. 18명이던 학생 수가 이젠 54명으로 늘어났으니 '작은학교 살리기'의 눈물겨운 노력의 결실이기도 하다.

90년대 초반까지 '콩나물 교실'이라는 말이 자주 쓰였다. 20평 남짓 좁은 교실에 학생들이 빈틈없이 앉아 있는 모습이 시루 속 콩나물을 연상시켜 붙여졌다. 지금은 28명이 과밀학급의 기준이나 당시엔 70~80명은 예사이고, 100명이 넘어서는 경우도 있었다. 담임교사가 학생 이름 외우기도 버거웠던 시절, 콩나물 교실에 넘쳐나던 학생이 그리워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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