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는 충돌하는 의견이나 갈등을 조정하는 넓은 의미도 갖지만 어쨌거나 국가권력을 차지하려는 활동이다. 정치는 권력을 획득하는 과정이자 수단이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조직이 바로 정당이다.

정치와 권력은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다른 듯하면서도 실제로는 한 몸뚱이다. 정치, 아니 권력의 세계가 비정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당하는 입장에서 '토사구팽(兎死狗烹)'의 억울한 일도 수두룩하다. '토사구팽'은 중국 고사성어인 '교토사, 주구팽(狡兎死, 走狗烹)'에서 유래한다. '(쫓기던)교활한 토끼가 죽으면 쫓던 사냥개를 삶아 먹는다'고 하니 잘 써먹고 이용 가치가 없어지면 버린다는 의미이다.

우리 정치사에서 '토사구팽'하면 국회의장을 지낸 김재순(2016년 작고)이 생각난다. '대통령 김영삼(YS)'의 일등공신인 그는 YS가 집권한 1993년 부정축재 혐의로 사퇴 압력을 받자 '토사구팽'이라는 말을 남기고 정계를 떠났다. 춘추시대 월나라 문종의 처지나 한고조 유방을 만든 한신을 떠올렸을 것이다.

김재순은 정치에 입문하고 한참 후인 40대 후반(1970년)에 월간 교양잡지인 '샘터'를 창간했다. 한때 50만 부 이상을 발행할 정도로 '국민 잡지'로 사랑 받던 샘터는 종이 매체의 침체로 휴간 위기를 맞았으나 지금도 반세기 넘는 국내 최장수 잡지의 기록을 써가고 있다. 우수영 출신인 법정 스님도 단골 필진이었다. 김재순은 '누구나 사서 읽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샘터가 담배 한 갑보다 싸야 한다는 지론을 가졌다. 지금 샘터 정가는 4500원이나 인터넷에서 4280원에 팔린다. 담배 한 갑(4500원)의 원칙을 지킨 셈이다.

요즘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와 박지현 전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이 몰락하는 과정을 보노라면 '토사구팽'이 딱 어울린다. 2030의 아이콘인 그들은 당으로부터 사실상 숙청당했다. 기득권 정치 세력은 선거라는 이용 가치가 사라지자 그들을 단칼에 쳐낸 것이다. 조선을 개혁하려던 사림(士林)이 수구세력인 훈구파의 반격에 밀려난 사화(士禍)와 아주 흡사하다. 누가 자초한 것인지, 누가 잘못한 것인지를 떠나 청년정치의 싹이 이토록 무참히 짓밟힌 흑역사는 정치사에 두고두고 회자될 것이다.

DJ(김대중 전 대통령)와 YS는 70년대 초 40대 기수론을 앞세워 정치의 전면에 등장한 이후 독재에 맞선 민주화의 거목(巨木)으로 자리잡았다. 한편으론 30년 가까운 유아독존(唯我獨尊)이 짙은 그늘도 만들었다. 양대 거목이 대를 이을 정치인의 햇빛을 차단한 것이다. 작금의 정치 지형이 이런 고전을 답습하는 모양새이다.

'DJ의 영원한 비서실장'으로 불리고 자칭 '영원한 현역'이라는 박지원이 지난 1일 목포에서 1박을 하고 2~3일 이틀간 해남, 진도, 완도를 여행하듯 다녀갔다. 진도가 고향인 그의 일정이 인연이라고는 거의 없는 해남에서 유독 빠듯했다. 송지초 강연에 이어 어불도, 대흥사, 미황사를 찾은 것이다. 여러 사람을 만나면서 정치의 '정'자도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정치는 생물이다'는 DJ 말을 즐겨 인용한다. 정치인의 모든 행동은 정치적이라는 말이 있듯이 그의 행보가 짜인 각본일 수도 있다. 80이라는 생물학적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할지 모른다. '노회(老獪)한 정치 9단'의 일거수일투족에 굳이 해석을 달 필요는 없지만 여러 생각이 중첩되기도 한다. 당구의 스리쿠션은 정치에서 일상으로 소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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