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혁승(연세대학교 경영대학 교수)

 
 

민주주의 위기론이 국내외적으로 심심치 않게 제기되고 있다. 민주주의가 개인의 자유와 평등, 인권을 보장하면서 사회변동에 따라 부상하는 제반 사회경제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하는 정치체제로서 여전히 유효한지에 대한 물음이다. 민주주의 위기의 본질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간의 갈등 관계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역사적으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상호 견인차가 되어 발전해왔다.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 아테네에서 기원전 5세기 중반 활짝 꽃피웠던 직접 민주주의는 기원전 404년 아테네가 군국주의 도시국가였던 스파르타에 패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났다. 그 이후 15세기 말 신대륙의 발견과 16~17세기 상업자본주의의 발전으로 자본을 축적한 부르주아 계층이 봉건적 신분 질서로부터 자유를 획득하면서 18~19세기 근대 민주주의의 길을 열었다.

그러나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상호 견인차 관계만은 아니었다. 정치이론가 샤츠슈나이더의 얘기를 들어보자.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조합은 긴장을 전제로 한다. 이런 긴장은 정치체제와 경제체제라는 두 권력 체계의 권력이 매우 다른 원리를 통해 조직된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증폭된다. 정치체제는 대체로 평등주의적이며, 정치에서 중요한 것은 수이다. … 이에 반해, 경제체제는 배타적이다. 그것은 높은 수준의 불평등을 조장하고 권력의 집중화를 장려한다."

자본주의는 시장에서 경제 주체들이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자유로운 선택과 경쟁을 장려한다. 그 과정에서 경제적 불평등이 나타난다. 어찌 보면 자본주의는 일정한 수준의 경제적 불평등을 동력으로 삼아 작동되는 경제체제라고도 볼 수 있다.

문제는 경제적 불평등의 확대 재생산이 민주주의 기반인 정치적 평등 원칙을 침해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직후 '1% 대 99%'라는 불평등 사회를 만든 미국 자본주의의 심장부에서 '월가를 점령하라!'는 구호를 외쳤던 시민들의 거센 정치적 저항은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러한 저항은 경제적 불평등의 피해자이면서 다수를 차지하는 시민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는 정치 권력을 창출함으로써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하려는 움직임으로 이어진다.

이와 같은 역사적 맥락에서 봤을 때 민주주의의 본질적 위기는 민주주의 정치 시스템이 민주주의의 가치를 지켜내면서 자본주의의 질적 변화를 견인해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느냐에 있다. 오늘날 신자유주의 자본주의가 심화시킨 빈부 격차, 탄소 의존적 경제성장으로 인한 환경 파괴와 기후 위기, 양극화 심화 등의 문제를 민주주의 정치 시스템이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정치적 지렛대가 될 수 있는지 여부가 중요하다. 그런 맥락에서 가장 심각한 민주주의 위기는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이 금권정치로 결합할 때 나타나는 바, 민주주의는 자본주의가 확대 재생산하는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하는 기능을 상실하게 되고 대다수 시민은 경제적 불평등의 희생자로 전락하게 된다.

통상 민주주의 정치체제의 근간으로 입법, 행정, 사법 간 삼권분립을 얘기한다. 하지만 이러한 삼권분립만으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의 긴장과 갈등 관계를 공생적 발전으로 승화시키는 데는 한계가 있다. 경제권력을 견제하면서 둘 사이의 긴장을 정치체제와 경제체제의 질적 변화로 이끌 수 있는 제3의 세력, 즉 시민사회의 견고한 성장과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역사발전의 동력은 서로 모순되는 것들 간의 갈등과 긴장으로 만들어지는 바, 한 사회가 그러한 갈등과 긴장에서 생성된 변화의 힘을 체제 내적 개혁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힘의 균형추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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