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률(교사)

 
 

안녕하세요? 오랜 가뭄 뒤 장맛비가 '내린 듯 만 듯' 합니다. 그 가뭄은 우리 이웃들의 속을 마르게 하고 속이 갈라지는 고통을 주기도 하였죠. 우리가 늘 그 고마움을 잊거나, 함부로 대하거나, 심지어는 파괴하기도 하는 자연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죠.

학부모님의 학창 시절을 떠올려 주십시오. 어떠셨습니까? 돌이켜 보니 만족스러우신가요? 만족스러운 분은 참 복 받은 분일 겁니다. 제 짐작으론 대부분 학교생활이 어려웠을 겁니다.

학교는 크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시설이 조금 좋아졌다는 것과 학급당 학생 수가 조금 줄었다는 것(물론, 선진국에 비하면 아직 너무 많지만요) 정도가 변화라면 변화겠죠. 여전히 아이들은 학교가 즐겁지 않고, 학교는 여전히 아이들의 꿈을 키우기엔 역부족이죠. 그 까닭이야 자명합니다. 대학이 쉽게 영업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입시제도와 소수자의 독점을 지원하는 경쟁체제와 거짓과 위선이 여전한 교육과정이죠. 거기에 놀아나는 우리 사회는 참 한심하기까지 합니다.

중앙대 김누리 교수는 한국교육을 '단 1도 쓸데가 없는 폭력'이라고 단언합니다. 저는 교사로서 참 부끄럽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한국 학교가 폭력과 차별과 혐오를 내재화하는 매우 이상한 교육기관이라는 데는 절대 다수가 동의하는 것 같습니다.

한번 보실까요? 우리가 좋아하는 경쟁은 관계를 절단합니다. 친구를 만들 수 없는 교육체제죠. '너의 불행이 곧 나의 행복'이 되는 교육, 그 불행을 짓밟고 올라가는 모든 행위는 차별과 혐오와 폭력을 내면화합니다.

학교에서 공부 잘한다는 것은 한 번의 시험으로 극소수의 입시 성공과 절대 다수의 탈락자를 만들고, '못난이 의식'을 각인시킵니다. 이것은 지옥입니다. 아이들은 낙오자로 자신을 인식하게 되고, 행복을 포기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비뚤어진 사회의식으로 표출되기도 합니다. '묻지마 폭력'은 그 파생의 하나죠. 그런데 말입니다. 성공해서 좋은 대학 가고 좋은 회사에 취직한다는 것 또한 노예가 되는 길에 다름 아닙니다. 그들은 선민의식에 병들고 그 선민의식은 또다시 폭력적 삶을 살게 합니다. 그들에게 과연 행복한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혹시 귀댁의 아이와 허심탄회하게 얘길 나눠보셨습니까? 시기별로 성장의 과정에 대해 아이의 소리를 들어보셨습니까? 노력해서 안 되는 일이 없다고 윽박지르진 않으십니까? 다른 집 아이와 비교하지는 않습니까? 아이의 미래에 대해 지레 불안해하지는 않습니까? 아이와 얼마나 시간을 가지십니까? 학교에 가고 나면 안심이 되십니까? 어깨 주물러주는 자식 사랑은 받으십니까? 기숙사에 있는 아이가 수시로 보고 싶진 않으십니까? 사랑이 사라지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으십니까?

풀 한 포기도 의미 없는 것은 없습니다. 아이가 태어날 때는 하나의 세상을 안고 태어난다고 합니다. 우리는 그 아이의 세상을 지켜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결국은 모두가 실패하는 이 교육체제에서 아이를 윽박질러 내모는 것이 우리가 하는 교육이라면 이제 좀 달라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학부모님, 교육 너무 믿지 마십시오. 대신에 아이를 믿어 보십시오.

결국 모두의 실패에서 벗어나 행복한 세상을 꿈꾸는 길에 함께하여 주시길 부탁합니다. 자연을 함부로 대하듯 아이에게 함부로 대하는 교육이 되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늘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추신:학교에서 오늘도 아이들은 뛰어다닙니다. 그런데 왜 뛰어야 하는지는 묻지 않습니다. 다음번에 왜 묻지 않는지, 능력주의와 학교의 다른 얼굴을 곁들여 얘기해 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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