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을 한껏 머금은 수박은 목마른 여름이 제철이다. 시설하우스 재배가 보편화되면서 대부분 과일이 사람에 의해 철을 빼앗겼다고 하지만 그래도 과일은 제철에 먹어야 제맛이다.

제철을 앞둔 수박이 정치권에서 어쩌다 금기어가 되는 수모를 겪고 있다.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이 '수박'이라는 단어를 쓰면 가만히 안 두겠다고 한 것이다. 수박이 당내에서 인신공격이나 분열적인 은어로 잘못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 말이 나오게 된 배경이 더 문제다. 민주당 대선 경선 과정에서 이재명 지지자가 이낙연 측의 친문계를 비난할 때 겉과 속이 다른 배신자라며 수박이라는 은어를 쓴 것이다. 정치판이 그런다고 하지만 참 치졸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겉과 속이 다른 과일이 어찌 수박만 있으랴만, 애먼 수박이 단골로 소환된다. 수박은 겉이 초록빛, 속은 빨갛다. 이 때문에 한때 '수박경제'라는 말도 나왔다. 겉은 시장주의지만 속은 빨간 공산주의를 빗댄 것이다. 1950년대 후반 관권선거가 판을 치자 겉과 속이 다른 '수박선거'를 해달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생뚱하긴 하나 제사상 얘기를 하나 해본다. 예부터 전해지는 제사장 차리기에 과일을 놓은 순서를 두고 홍동백서(紅東白西)라는 게 있다. 붉은 과일은 동쪽(오른쪽), 흰 과일은 서쪽(왼쪽)에 놓아야 한다는 기준이다. 근데 붉은색 대추, 갈색의 밤이 왼쪽, 흰 과일인 배는 오른쪽에 놓인다. 이를 지켜보던 어린 시절엔 참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다가왔다. 집안 어른이 밤은 속(알)이 하얀색에 가깝기 때문이라고 설명한 기억이 난다. 결국 겉과 속이 다른 밤은 깎아서 제사상에 놓기 때문에 하얀색이라는 것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제사상 차리는 기준에 홍동백서에 맞서는 조율이시(棗栗梨枾)라는 것도 있다. 조는 대추, 율은 밤, 이는 배, 시는 감을 일컫는다. 이를 순서대로 왼쪽부터 놓아야 한다는 것. 이런 기준이 생겨난 얘기를 들으면 사실 여부를 떠나 우습다는 생각도 든다. 대추는 씨앗이 하나밖에 없어 임금을 뜻해 과일의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하고, 세 개인 밤은 삼정승을, 여섯 개의 배는 육조판서를, 여덟 개의 감은 팔도 관찰사를 상징한다는 속설이다.

수박의 원래 고향은 아프리카이다. 이게 건너고 건너서 고려시대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근데 고려를 배신한 홍다구가 원나라에서 가져왔다며 조선시대까지 제사상에 수박을 올리지 않았다고 한다. 이래저래 수박은 억울하다.

수박은 우리나라에서 진화를 거듭하고 있는 과일이다. 그중 하나가 미니수박, 즉 애플수박이다. 껍질이 얇고 크기도 일반 수박의 4분의 1 정도로 작아 사과처럼 과도로 깎아 먹을 수 있다고 해서 애플이라는 애칭이 붙었다. 1~2인 가구가 늘어나고 음식물 쓰레기 발생량도 적어 인기를 얻고 있다. 애플수박은 10년 전 경북 문경의 한 농가가 처음으로 재배해 전국으로 퍼졌고, 이젠 세계로 수출되는 한국산이 됐다.

지난주 해남신문(6월 24일자)에 삼산에서 애플수박을 수확하는 청년 창업농의 기사가 실리자 여기저기서 문의 전화가 쏟아졌다. 모두가 재배기술을 배우고 싶다고 했다. 온갖 시행착오와 연구를 거듭해 익힌 재배기술을 공유하겠다는 청년농의 마인드에경의를 보내고 싶다. 해남에는 애플수박이 아직 걸음마 단계이다. 생산 농가들이 노하우 전수를 꺼리고 있기 때문이다. 젊은 창업농의 선구자적 뜻이 애플수박이 뿌리 내리는 자양분이 되고, 시너지 효과로 이어져 상생하는 해남이 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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