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살던 시골 면에는 5일장이 서지 않았다. 어머니는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10리(4㎞)도 넘는 인근 면의 5일장을 걸어서 다녀왔다. 새벽에 출발해도 해 질 녘에야 집에 도착했다. 꼬박 하룻낮을 걸어 몸은 파김치가 되곤 했다. 교통편이 부족해 장날엔 버스를 타는 게 언감생심이다. 큰 짐은 옆 마을 아저씨의 말이 끄는 달구지에 맡기고 가벼운 물건은 머리에 인 채 10리 길을 되돌아왔다. 그때 우리는 달구지를 구르마(수레의 사투리)라고 불렀다.

지금도 가끔 어머니에게 어떤 대답이 나올지 알면서도 묻는다.

"장날에 다른 생선도 아니고 왜 맨날 갈치, 고등어만 사 왔어요?" "싼 맛에…." "지금은 비싼 생선인디." "그땐 장에 나온 가장 흔하고 값싸고…." 그땐 그랬다. 바다에 널린 게 갈치이고 고등어다. 고기 잡는 기술이나 장비가 지금보다 형편없어 재수 없는 놈만 걸려도 어선을 채웠다. 짱뚱어는 눈에도 안 들어왔다. 지금은 갯벌 생태계의 보물인 짱뚱어도 싹쓸이한다. 전남의 갯벌은 전국의 90% 가까이 차지한다. 그래서 짱뚱어 요리가 전남의 전통 요리라고 한다. 옛날에는 잡지도 않던 짱뚱어 요리를 '전통'이란다. 차라리 '신 요리'라고 하면 받아들이겠다.

갈치 이야기가 나오면 묻는다. "먹갈치와 은갈치 차이는?" "다른 종이 아니냐?" "똑같은 갈치인데 먹갈치는 그물로 잡고 은갈치는 낚시로 잡아 올린 거여. 그물로 대량으로 잡으면 지들끼리 부딪혀 은빛이 없어져서…."

갈치 이야기를 하자니 참 이상하다. 주변의 많은 사람은 먹갈치가 더 맛있다고 한다. 근데 가격은 은갈치가 훨씬 비싸다. 갈치는 물 밖으로 나오면 바로 죽는다. 그물을 물 밖으로 끌어 올리는 데 시간이 꽤 걸릴 것이고, 그 시간만큼 스트레스를 더 받으면서 죽어간 갈치가 더 맛있다고 하니 고약스럽기도 하다.

어릴 때 어머니를 따라 10리 길의 5일장을 가본 적은 없다. 지금은 광주 양동시장이나 대인시장, 남광주시장을 가끔 따라간다. 하지만 도심에 자리 잡은 상설 전통시장일 뿐이다. 그래도 담양으로 향하는 길목에 있는 말바우시장은 5일장 냄새가 난다. 길가에 좌판이 쭉 깔려야 5일장의 맛도 느낄 수 있다.

전남의 그 많은 5일장 가운데 시·군마다 한 곳씩은 가보았다. 해남의 5일장은 대부분 만나봤다. 옛날에 비할 바는 아니더라도 장날이면 사람이 모여든다. 사람 냄새가 풍긴다. 번듯한 현대식 장옥보다는 좌판에 손님이 더 몰린다. 이 때문에 장옥을 가진 상인도 좌판에서 장사한다. 물건을 사러 온 사람은 좌판을 더 좋아한다. 5일장의 맛은 역시 좌판에서 나온다.

물산이 풍부한 해남에는 14곳에 5일장이 섰다. 읍면에 하나꼴이다. 이 중 6곳은 1990년 이전에 사라졌다. 살아남은 8곳도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찾는 사람이 줄자 팔 사람도 줄어들고, 그러면 찾는 사람은 더욱 줄어드는 악순환이다.

북일의 좌일시장은 한때 해남에서 내로라하는 5일장이다. 이젠 장터라고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쇠락했다. 장날에도 사람 구경하기 어렵다. 그래서 주민들이 일어섰다. '시장 활성화'의 이름을 내걸고 장날인 지난 주말 대대적인 행사가 열렸다. 북일의 또 다른 작은학교 살리기이다. 오랜만에 사람도 몰렸다. 이날 여러 이벤트는 마중물이다. 마중물은 작두 펌프 저 아래에 있는 물을 마중하는 역할이다. 사람이 모이면 상인도 모이고, 그러면 찾는 사람도 더 늘어난다. 그게 선순환이다. 이번 마중물이 스러져가는 5일장에 부활의 생명수가 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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