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은희(목포대 강사·해담은3차아파트 공동체 대표)

 
 

며칠 전, 집으로 돌아오는 길가 논에서 가종하는 농부를 봤다. 예전에는 모내기가 끝나고 일주일쯤 지나면 어머니는 늘 논으로 출동 준비를 하고 오랫동안 출정했다.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주황색 물신을 신고 물속에서 흘러내릴까 녹색 노끈 허리띠에 물신의 고무줄을 묶고 가볍고 물이 잘 빠지는 선물용 플라스틱 과일바구니를 한 손에 들었다.

그러면 아버지는 어머니와 같은 복장을 한 동네 사람 대여섯 명을 태우고, 논으로 가기 위해 경운기 시동을 걸었다. 어머니와 동네 아짐들은 허리를 숙였다 폈다 하며 모가 빠진 자리를 메꾸며 나아갔다. 그 때는 저수지 물이 닿지 않는 다랑이논에도 이중삼중의 양수를 해가며 모를 심었고 콩이며 녹두 같은 작물을 한 알이라도 더 심으려 밭둑을 깎았다. 그렇게 억척을 부렸던 그들이 이제는 가종은커녕 보행기에 의존하여 그림자처럼 걸어 다니면서 젊은이들은 떠나고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울음소리도 들린 지 오래인 마을을 지키고 있다.

지금은 밭둑이 넓어지고 또 넓어지다 묵정밭이 되었고 다랑이논들은 묵정논이 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드나들기 불편하면 논밭을 묵힌다. 묵혀지는 것이 비단 농경지만은 아니다. 사람 떠난 집도 묵혀지다가 끝내 빈터가 되고 슬슬 쓰레기장으로 변해간다. 해남읍의 해리 512번지도 아마 이와 같은 노정을 걸었으리라.

지금은 수치가 더 늘어났겠지만 해남군청 홈페이지에 의하면 2019년 해남군 전체의 주택보급률이 모든 면에 걸쳐 110%를 웃돌고 있고 심지어 계곡면은 141.6%에 달한다. 그런데 읍은 주택보급률이 93.7%인데도 해리 512번지 같은 곳들이 종종 눈에 띄는 기현상이 발생한다.

도로에서 조금 벗어난 그곳은 아이들의 통학길이기도 해서 통행량도 적지 않다. 재작년까지 쓰레기장이었다. 작년에는 수세미 밭이었고 올해도 읍사무소와 환경과 공동체를 생각하는 여러 사람이 시간나는대로 '비밀 꽃정원 해리 512번지'를 가꿔 가고 있으며 누구든지 동참할 수 있다고 한다. 지금 해리 512번지는 여러 가지 꽃이 피어 있고 또 피는 중이다.

읍사무소의 정지 작업 후 뜻을 함께하는 어느 개인이 자신의 정원에서 몇 종을 뽑아 이식한 후 해리 512번지의 이웃이 나눠 준 물을 뿌린 게 이 프로젝트의 첫 삽이었는데 다음 날 아침 가보니 인상적인 장면이 펼쳐졌다. 대부분의 모종이 고개 숙여 환경변화의 고달픔을 표현하고 있는데 바로 자리를 잡아 곧추선 코스모스 모종이 몇 개 있었다. 또 물을 주고 돌아오기를 사나흘 반복했는데 제일 먼저 곧추선 모종들은 완전히 터를 잡은 반면 그렇지 않은 모종들은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고 어떤 것들은 아예 살아남지 못했다. 아마 옮겨올 때 흙을 좀 많이 달고 온 모종들이 금방 곧게 섰고 아예 생존하지 못하는 모종들은 흙 한 방울 달고 오지 못한 모양이다. 바로 그 흙이 꽃의 자산이었던 것이다.

식물이나 사람이나 비빌 언덕이 있으면 살아가는 데 힘이 덜 드는 게 당연하다. 전체 자산 가치를 국민소득으로 나눈 값인 피케티 지수가 높을수록 불평등한 사회라며 우리나라는 10년 동안 계속 상승하면서 자산불평등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는 인터넷 기사가 떠올랐다. 부동산의 가격 상승과 금수저 대물림이 주된 이유라고도 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는 할아버지의 재력이 대학입시 성공의 조건이라는 웃픈 말이 세간에 떠돈 지 오래다.

비빌 언덕이 더 절실한 외롭고 가난하고 힘없고 소외받는 사람들의 자산은 이웃과 지역 그리고 사회와 행정이다. 마을공동체가, 지역공동체가 활성화되어야 할 이유다. 출범을 앞둔 해남 민선 8기가 군민의 비빌 언덕이 되어줄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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