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복이 지나도 비는 오지 않았다. 중복이 지나도, 말복이 지나도 비는 오지 않았다. 논에서는 땅이 쩍쩍 갈라졌다. 동네에 하나밖에 없는 우물물도 줄어들어서 동네에서는 하루에 세 동이 이상은 한 집에서 못 길러가게 하는 새 규칙을 세우고 밤이면 엄중하게 파수(把守)를 보았다. 금성산에 분묘(墳墓)도 파러 갔고 부인들이 하는 미신적 행동이란 행동은 다 따라가며 하였다.' 목포 출신 작가 박화성이 1935년 발표한 나주를 무대로 한 소설 '한귀(旱鬼)'에 나오는 내용이다. 한귀는 가뭄을 맡고 있다는 귀신이다. 오로지 하늘만 쳐다보며 농사를 짓던 당시엔 가뭄이 소설의 단골 소재이기도 했다.

소설에서 가뭄으로 묘를 파헤치는 대목이 있다. 불과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가뭄이 묘를 잘 못 쓴 탓이라는 미신이 엄연히 있었다. 미신인 줄 알면서도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절박한 심정이 파묘(破墓)라는 극단적인 행동으로 몰고 갔다. 1968년은 전년에 이어 '육팔한해'라고 불릴 만큼 최악의 가뭄이 들면서 질곡의 해로 기록된다. 워낙 가뭄 피해가 심했던 터라 해남에서도 묘 때문에 비가 오지 않는다는 말이 퍼지면서 여자들이 파묘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런 분풀이성 파묘로 인해 그해 전남에서 60명 가까이 입건되기도 했으나 가뭄 피해의 심각성 때문에 기소로 이어지진 않았다. 가뭄이 극심했던 1977년에도 담양에서 주민 100여 명이 산에 올라가 묘를 파헤친 사건이 있었으니 45년 전까지도 이런 파묘가 사라지지 않았음을 짐작하게 한다.

가장 유명한 파묘 소동이 있다. 지금의 광주역은 태봉산(胎封山)이 있던 자리인데, 1967년 이 산을 깎아 경양호(옛 광주시청 자리)를 매립하면서 둘 다 자취를 감추고 이젠 태봉초등학교만이 이름을 잇고 있다. 태봉은 태(태반이나 탯줄)와 평지에 그릇을 엎어둔 듯한 둥근 봉우리 형태에서 이름 지어졌다고 전해졌으나 파묘 사건으로 그 유래가 명확해졌다. 1928년 극심한 가뭄으로 주민들이 태봉산의 묘를 파헤치자 태를 묻은 항아리와 태의 주인을 기록한 지석(誌石)이 나온 것이다. 지석에는 1624년 태어난 '대군 아기씨'(조선 인조의 넷째 아들)라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우리나라에는 가뭄과 관련된 속담이 많다. '가뭄에 콩 나듯', '오랜 가뭄 끝에 단비 온다', '삼 년(칠 년) 가뭄에 하루 쓸 날 없다', '뿌리 깊은 나무 가뭄 안 탄다', '가뭄 철 물웅덩이의 올챙이 신세' 등등. 빗물에만 의존하던 시절, 오랜 가뭄에 농민들의 속이 얼마나 타들었을지 상상하고도 남는다.

길어지는 최근의 가뭄이 예사롭지 않다. 벼농사는 저수지 물을 대 넘어간다더라도 하늘에 더 의지해야 하는 밭작물은 바짝 말라간다. 스프링클러가 없는 고구마, 참깨, 고추 등의 밭은 물기가 사라져 흙이 돌처럼 굳었다고 한다. 최근 두 달간 해남의 강수량이 예년의 14% 수준에 그쳤다. 자연재해에 다름 아니다. 이번 주초 잔뜩 흐리던 날씨에 기대를 걸었으나 이마저도 물거품이 됐다. 시멘트 바닥조차 적시지 못할 정도의 강수량에 농민들의 입술이 바싹 탄다.

돌발성 가뭄이라는 게 있다. 폭우처럼 기습적으로 닥쳐 며칠 또는 몇 주 만에 토양이 메마른 현상이다. 더위와 강수 부족에 뒤따라온 돌발성 가뭄은 온난화로 대표되는 기후변화의 한 변이이다. 밭작물이 막 성장하려던 차에 찾아온 돌발성 가뭄이 새로운 자연재해로 떠오른다. 가뭄이야 유사 이래 늘상 되풀이됐다지만, 이런 변이성 가뭄은 농작물에 또 다른 시련을 안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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