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혁승(연세대학교 경영대학 교수)

 
 

최근 능력주의가 정치적 화두로 소비되고 있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는 "실력만 있으면 어떠한 차별도 존재하지 않는 공정한 경쟁 사회를 만들겠다"고 주장했다. 그런가 하면 윤석열 대통령은 내각을 구성하면서 다른 고려사항은 배제하고 오직 능력만을 기준으로 삼았다며 능력주의를 명분으로 갖다 붙였다.

국어표준대사전에는 능력주의란 '학력이나 학벌, 연고 따위와 관계없이 본인의 능력만을 기준으로 평가하려는 태도'라고 정의되어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능력주의는 봉건제적 신분제로부터 개인들을 해방시킴으로써 근대 자본주의의 길을 열었다. 타고난 신분에 따라 재능을 발휘할 기회조차 가질 수 없었던 평민과 하층민들에게 희망을 주고 자신의 성공을 위해 노력하려는 의지를 불어넣었던 것이다.

이처럼 역사적으로 능력주의는 계층 이동의 문이 닫혀있음으로 인해 사회구성원들의 성장 잠재력이 잠식되는 상황에서 경직된 사회적 계층구조를 깨뜨리는 기능을 감당했다. 특정 이념이 역사 진행 과정에서 특정 시대의 한계와 축적된 모순을 극복하며 새로운 시대의 길을 여는 데 기여한 예이다.

우리 사회에서도 능력주의가 사회적 규범으로 작동해왔다. 해방 이후 전쟁의 폐허를 딛고 경제개발을 이룩하는 과정에서 대부분의 사회구성원들이 빈곤이라는 동일한 출발선에서 시작하여 공교육의 사다리를 통해 계층 이동의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능력주의가 사회적 규범으로 작동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가 하면 기업들에서는 IMF 외환위기를 전후하여 전통적인 연공주의 인사시스템을 폐기하고 조직구성원 개개인의 능력과 성과를 급여에 반영하는 능력주의 인사시스템을 대대적으로 도입하였다.

그러나 사회경제적 계층 이동의 기회 측면에서 우리 사회는 이미 경화증세를 보이는 단계에 이르렀다. 계층이동의 문은 갈수록 좁아지고, 경제개발 이후 두 세대를 거쳐오는 동안 형성된 부의 불균형과 사회경제적 기회의 불평등이 후속 세대에게 세습되고 고착화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계층 이동의 대표적인 사다리로 활용되어왔던 대학 진학의 현실을 보면 소위 명문대학의 진학률과 부모의 사회경제적 계층 사이의 연관성이 크게 높아졌다. 젊은이들의 취업 기회나 기업가적 도전 기회 등에서의 계층간 불평등도 심화된 상태이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주창되는 능력주의는 자칫 기존의 세습된 불균형과 불평등까지 개인의 능력 차이가 만들어낸 결과인 것처럼 호도함으로써 현 상태를 정당화하는 명분으로 악용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운칠기삼(運七技三)이라는 말이 있다. 운(運)이 칠 할이고 기(技)가 삼 할이라는 뜻이다. 한 사회에서 개개인이 누리는 소득과 부도 기(技)로 표현되는 자신의 능력에 의해 오롯이 얻어진 것이라기보다는 운(運)으로 표현되는 자신의 능력 외적 요인, 예컨대, 사회경제적 인프라와 사회적 자본의 뒷받침을 받아 얻어진 것이라 볼 수 있다.

하버드대학 교수인 정치철학자 마이클 샌델은 능력주의 윤리의 폐해로서 승자들이 자신들의 승리를 오직 자기 재능과 노력의 결과라고 여기게끔 하고, 그보다 운이 나빴던 사람들을 깔보도록 함으로써 그들의 불만과 분노를 유발하고 연대감을 약화시킨다는 점을 지적하며, 능력주의가 공평하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일갈한 바 있다. 세습된 불균형이 실질적 기회의 불평등을 야기하는 한 진정한 의미에서의 능력주의가 작동된다고 볼 수 없다.

지금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은 기존의 세습된 불균형과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능력주의가 아니라, 각 세대가 동일한 출발선에서 경주할 수 있도록 계층 이동의 기회를 활짝 열어젖히는 공적 계층 이동 사다리를 견고하게 세울 때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필요한 창의적 인재를 길러낼 수 있도록 공교육의 질을 획기적으로 높이고, 직업의 상향 이동을 뒷받침할 수 있는 공적 평생학습시스템과 사회적 안전판을 크게 높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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