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끝에 서서/더는 갈 곳 없는 땅끝에 서서/돌아갈 수 없는 막바지/새 되어서 날거나/고기 되어서 숨거나/바람이거나 구름이거나 귀신이거나 간에/변하지 않고는 도리 없는 땅끝에/혼자 서서 부르는/불러/내 속에서 차츰 크게 열리어/저 바다만큼/저 하늘만큼 열리다/이내 작은 한 덩이 검은 돌에 빛나는/한 오리 햇빛/애린/나.'(김지하 의 '애린'/1986)

땅끝을 배경으로 한 '애린'은 '죽고 새롭게 태어나는 존재'라고 했다. 땅끝전망대 바로 아래에 서 있는 시비(詩碑)는 오가는 사람들에게 시인 김지하의 고뇌를 느끼게 한다. 연작 시집 '애린'은 생명사상과 동학사상을 연결하고자 했다. 동학군 5000명이 대흥사 입구 삼산 구림리에서 전멸했다는 이야기가 바탕에 깔려있다.

목포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을 보낸 김지하는 어릴 때 배를 타고 외가(산이면 상공리)를 가끔 찾았다. 여름방학을 맞아 간 조그마한 포구 상공리 언덕에서 바라보는 바다와 배가 평생 심상(心像)으로 남았다. 회고록(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에서 이렇게 적었다.

'객지를 떠돌면서도 해남 그 여름 대지의 영상은 신앙처럼 살아 있어 향수의 차원을 넘어 온갖 아름답고 심오한, 때로는 참혹하고 무서운 상상들을 자아내곤 했다. 초기 서정시에 자주 번뜩이는 뜨겁고 풍요로운 생명력 넘치는 남쪽의 이미지들은 목포 쪽보다는 해남의 여름 영상에 닿아 있다.'

김지하는 40대 중반인 1985년부터 3년가량 '마음의 고향' 해남에 정착해 지친 심신을 달래고 창작활동을 한다. 처음엔 여관에 머물다 단군전 건너편 아파트를 얻어 가족을 불러들이고, 이내 옛 천석꾼 고가인 '남동집'을 마련한다. 회고록(흰 그늘의 길)에 '아내의 집'이라고 한 '남동집'에서 보낸 시기가 아내에게 가장 애틋하고 행복한 시절이었다고 적었다. 아내 김영주(2019년 작고)는 '토지' 작가 박경리의 외동딸이다. 두 아들(원보·세희)은 해남에서 초등학교와 유치원에 다녔다. 아내는 남편의 해남행을 두고 '늘 술에 절어 환경을 바꾸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김지하의 해남 생활이 평탄하지는 않았다. 남동집으로 이사하면 금주한다는 말도 지켜지지 않았고, 많은 사람이 찾아와 속을 뒤집어 놓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으로 정신병원 입원도 했다고 한다. 그래도 김지하는 해남에서 많은 흔적을 남겼다. 전통찻집인 '동다원'에서 사람을 만나며 영감을 얻고 작품을 구상하기도 했다.

한때 '목포의 3대 천재'가 회자됐다. 김지하와 더불어 '대통령을 시험으로 뽑는다면 1순위'라는 공부의 달인 천정배, '한국기원 프로기사 첫 9단'의 바둑황제 조훈현을 두고 하는 말이다. 술자리서 오갔건, 자작설이건 그럴듯해 퍼진 얘기이나 천재의 특성이 '창조성'과 '뛰어난 정신 능력'이라고 한다면 김지하가 가장 가깝다.

'천재' 김지하가 얼마 전 81세의 일기로 타계했다. 그의 삶의 궤적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1970년 발표한 '오적(五賊)'은 재벌, 국회의원, 고급 공무원, 장성, 장·차관의 비리와 부정부패를 풍자했다. 이 때문에 구속되고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선고도 받았다. 그런가 하면 대학가에 분신자살이 잇따르자 1991년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우라'는 칼럼을 써 진보 진영에서 변절자로 낙인되고 '왕따' 신세가 됐다.

그렇더라도 그를 빼놓고 70년대 문학사를 얘기할 수 없다. 그래서 많은 작가가 '남동집'을 찾는다. 해남의 문학적 자산을 생각한다면 남동집을 보존하는 방안도 괜찮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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