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왔다. 나는 비가 싫다. 새싹이 트고 보리가 나도 비가 싫다. 학교갈 때 비바람이 몰아쳐서 우산이 찢어질 뻔했다. 그래서 옷을 다 버렸다. 오늘은 우산 말고 비옷도 입었는데 나도 모르게 옷이 몽땅 젖었다. 집에 와서 다시 머리 빗고 점퍼를 말렸다. 후∼ 나는 비가 싫어. 진짜로. 비님께는 죄송하지만...’
오늘도 민지는 옷이 다 젖어서 학교에 왔다. 비가 오는 날 민지(송지초등학교 서정분교 3년)의 일기는 어김없이 비가 싫다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애써 옷이 젖기 때문이라고 말 하지만 비가 오는 날 민지는 옷보다 먼저 마음이 젖는다. 친구들은 엄마 아빠가 자동차로 학교까지 데려다 주지만 민지에겐 그런 엄마 아빠가 곁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1시간이 넘는 등교길을 민지는 그 작은 몸을 우산 하나에 의지해 학교에 온다.
그래도 우산을 쓰고 학교에 온 날은 기분이 괜찮은 편이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비가 쏟아질 때, 제 몸 하나 가려줄 우산조차 없을 때 민지는 혼자라는 사실을 뼈아프게 느낀다. 교실 앞에 우산을 들고 마중 나온 엄마 아빠들 사이에 애면글면 아무리 찾아보아도 자신의 엄마 아빠가 있을 리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민지는 친구들이 학교를 다 빠져나갈 때까지, 그리고 비가 멈추고 잦아들 때까지 혼자 교실에 우두커니 앉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엄마 아빠와 함께 도시에서 살 땐 민지도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던 아이였다.
유난히 초롱초롱한 눈망울과 당차고 야무져 누구에게나 사랑을 받던 밝은 아이였다. 그러나 엄마 아빠가 헤어지고 3년 전 할머니 집에 맡겨지면서 민지 얼굴엔 유난히 그늘이 깊어졌다. 할머니와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 하늘을 쳐다보는 것도 싫어졌다. 그래서 걸을 때면 늘 고개를 푹 숙이고 걷는 버릇이 생겼다.
민지는 아직 엄마 아빠가 이혼한 사실을 모르고 있다. 엄마에게선 연락이 뚝 끊기고 가끔 아빠에게서 전화가 오는 걸로 보아 예전처럼 세 식구가 단란하게 살 수 없다는 것을 짐작만 해볼 뿐이다.
민지의 일기엔 항상 할머니 얘기로 가득하다.
“할머니랑 사는 게 좋아요. 우리 할머닌 자상해서 나한테 잘 해주시거든요”
숙인 고개를 들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가던 민지가 애써 밝은 표정을 지으며 할머니 자랑을 한다. 제 딴에는 세 식구가 함께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서둘러 털어내고 싶은 모양이다.
민지는 집에 돌아오면 학교에서 빌려온 동화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곤 한다. 동네에는 친구가 한 명도 없는데다 할머니는 늘 농사일로 바쁘기 때문에 혼자서 시간 보내는데는 이골이 났다. 민지가 동화책을 좋아하는 건 상상속에서나마 동화속의 주인공이 되어볼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구도 방해하지 않는 상상의 공간에서 민지는 마음껏 신데렐라도 되어보고 백설공주도 되어본다. 민지는 슬프게 끝나는 이야기보다 신데렐라나 백설공주처럼 행복하게 끝이 나는 동화를 좋아한다. 엄마 아빠와 헤어진 아픔이 가슴속에 자리하고 있기에 슬픈 이야기는 애써 피하고 싶은 것이다.
“민지는 감성과 상상력이 풍부한 아이예요. 다른 아이들보다 혼자서 보내는 시간이 많다보니 자연히 그렇게 된 것 같아요” 민지 담임선생님의 이야기다.
요즘 초등학교 한 학급에 네 뎃명은 민지처럼 부모와 떨어져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산다. 대부분이 도시에서 맞벌이를 하는 부모 때문이다. 그들에겐 어린이날이 별 의미가 없는 날이다.
민지는 커서 가수가 되고 싶다. 다른 사람들에게 재미있는 노래를 많이 들려주고 싶단다.
모든 사람들이 슬프지 않고 재미나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바람이 그런 꿈을 갖게 했다.
엄마 아빠와 함께 놀이공원에 놀러갔던 어린이날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민지는 이번 어린이날에는 아빠가 사는 집에 가보고 싶다. 아빠는 어떤 집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민지가 많이 보고 싶지는 않았는지 물어보고 싶다.
이제는 놀이공원으로 놀러가는 바람 따윈 갖지 않는다. 그저 보고 싶을 때 언제라도 볼 수 있는 엄마 아빠가 곁에 있어주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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