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평호(북일면 주민자치회장)

 
 

먹이를 찾아 멀리 이동하지 않고 한 곳에서 일생을 마치는 새를 텃새라 한다. 대부분 텃새는 날아다니는 지역이 그렇게 넓지 않다. 텃새들의 덩치도 대부분 왜소하다. 자기 지역에 다른 새들이 들어오는 것을 지극히 경계하고, 쫓아내려고 사투를 벌이곤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좁다란 지역에 다른 새가 오면 먹이도 줄고, 어렵게 자리 잡은 자신들의 삶의 터전에서 쫓겨날까 봐 그럴지도 모른다. 그것이 작은 공간에 적응한 텃새의 운명이다.

지구상의 새 중에서 가장 멀리 날아가는 큰뒷부리도요새는 쉬지 않고 열흘 정도 1만2050km를 비행하여 알래스카에서 뉴질랜드로 날아간다고 한다. 다시 뉴질랜드에서 알래스카로 돌아갈 때는 뉴질랜드에서 한국의 금강 하구로 와서 한 달 정도 머물다가 알래스카로 날아간다고 한다. 그때의 비행거리는 1만5700km라고 한다. 아주 커다란 점보 비행기가 아니면 날아갈 수 없는 거리이다.

철새의 이동 경로가 이렇게 먼 이유는 도요새의 운명일 수도 있으나, 그만큼 지구의 자연환경에 잘 적응한 결과이기도 하다. 텃새의 입장에서 보면 무슨 고생이냐고 핀잔 놓을 수 있으나, 거꾸로 철새의 입장에서 보면 한 곳에서만 아웅다웅하며 혹시나 누가 올 새라 늘 싸우고 쫓아내고, 인간들에게 뜯기는 고생을 왜 하냐고 말할 것이다. 드높은 창공을 날며 맛있는 먹이를 먹으며 싸우지 않고 여유롭게 살아가는 맛을 모른다고 말이다.

철새들의 도래지를 보면 뭇 새들이 어우러져 산다. 모든 새가 어우러진 공간이다. 일몰 즈음 하늘로 솟는 집단 군무는 장관이다. 어떤 새도 쫓겨남이 없이 어울려 잘 살다가 때가 되면 각자 갈 길로 간다. 그러나 작은 텃새일수록 그 조그마한 땅덩어리에 누구라도 오기만 하면 난리법석을 떨고 기어코 쫓아내고야 만다.

우리의 생활을 돌아보면 텃세로 인한 스트레스가 의외로 많다. 이런 텃세는 곳곳에 널려있다. 마을에서, 회사에서, 학교에서, 심지어는 종교시설에서조차도. 삶이 팍팍한 세상에서 보기 드물지 않은 풍경이다. 양아치들의 구역관리(속어로 '나와바리')나 다름없는 텃세가 많다. 텃세는 아집을 공고히 하는 일종의 병든 심리이다. 먼저 자리 잡았다는 것을 권력처럼 행세하는 이들은 공감 능력이 없는 배타적인 인간들이다.

텃세는 평범한 사람들의 악의적인 폭력이자 죄악이다. 병리 현상의 일종인 텃세가 꽈리를 틀고 있는 지역은 미래가 없다. 인생 가득히 사랑을 담아보는 꿈, 이루지 못해도 가보려는 노력이 우리를 아름답게 한다. 좁다란 시야에 억지로 세상을 가두고 행세하지 말았으면 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프루크루테스라는 괴물은 사람을 아주 특이하게 죽인다. 지나가는 행인을 잡아 자기가 만든 침대에 눕혀 꽁꽁 묶어 놓고, 행인의 다리가 침대보다 길면 잘라 죽이고, 침대보다 짧으면 강제로 늘려 죽인다. 끔찍한 괴물이다. 우리 주변에는 의외로 이런 괴물들이 많다. 자기만의 기준으로 세상과 사람을 단정해서 죽이고 모함하는 이들이 많다. 임기가 정해진 권력 집단이 이러한 텃세를 부리면 그 나라의 미래는 뻔하다.

인간은 애초부터 텃새도 철새도 아니다. 자유로운 영혼이 인간 아닌가. 국경 없는 사랑처럼 나이를 잊은 봉사활동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즐겁게 희생하는 이들의 행동에 동참하지 못할망정 비아냥거리지 말기 바란다. 인간답게 사는 일, 답은 없다. 그러나 훌륭한 길은 많다. 우리는 박힌 돌도 굴러들어온 돌도 아니다. 인간이다. 잠깐 즐거운 여행을 하다가 갈 인생, 따뜻한 사랑이 널리 퍼지길 빌면서, 파란 창공을 날아가는 여유로운 도요새를 새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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