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숙자(비슬안 대표)

 
 

긴 겨울을 깨고 봄이 왔다. 새로운 시작을 앞두고 비슬안 태인마을 할머니들은 궁금한 게 많나 보다.

"언제, 다시 모태서 공부는 한당가?"

"작년 거 숙제는 모다들 했으까?"

오가며 자꾸 물어온다. 비슬안 태인마을은 작년에 해남형 마을공동체 사업을 진행했다. 처음에 그림동화책을 읽어드렸더니, 얼굴을 붉히며 애들도 아닌데 이런 책을 읽느냐는 분도 계셨지만, 어린 시절 짧았던 학교가 생각나신 듯 흥분과 호기심으로 즐거워하셨다. 시집을 와 70년 세월, 호미만 쥐던 손이 연필을 잡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환하게 웃었다.

여자가 글을 알면 팔자가 세진다는 시절이 있었다. 집안을 일으킬 오빠와 남동생 때문에 희생하는 게 당연하던 시절이 있었다. 나중에, 아주 나중에 자식들 학교 보내며 그것으로 못 배운 한을 달래기도 했었다.

비슬안 태인마을은 작년에 전라남도가 공모한 마을공동체사업에서 떨어졌다. 하지만 전남형이 아닌 해남형으로 마을공동체사업 씨앗 단계를 진행할 수 있었다. 해남형으로 구제되지 못했다면 할머니들의 환한 미소는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올해는 작년의 경험과 할머니들의 뜨거운 반응으로 전남형 마을공동체 사업에 선정되었다. 올해도 유년 시절로 돌아간 할머니들의 해맑은 미소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할머니들과 모두 함께 사는 행복한 농촌마을을 만들어갈 것이다.

오래된 마을은 대대로 묵은 감정이 쌓여있고, 새로운 마을은 그 나름의 갈등이 존재하는 게 사람 사는 세상일 게다. 태인마을이라고 이웃끼리 묵은 감정들이 없었던 게 아니다. 그런데 마을공동체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처음으로, 대놓고 서로에게 칭찬하고는 박장대소했다. 그렇게 해묵은 감정의 응어리들이 웃음 속에 녹아 정말 이웃사촌을 넘어 가족이 되어가고 있었다. 마을공동체 사업으로 함께하는 시간을 통해 어르신들이 행복을 찾아가는 것 같았다. 서로 마음을 열고 칭찬하고, 양보하고, 배려하면 서로를 가로막던 성벽도 허물어질 터였다.

과거 농촌은 그 자체가 공동체였다. 품앗이로 서로의 손이 아쉬웠고, 담 너머로 음식 넘겨주는 이웃이 있었다. 그러던 게 공업화에 몰려 빈집이 늘고, 기계화로 품앗이 또한 사라지면서 이웃보다는 텔레비전과 소통하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마을 일보다는 먼 동네, 먼 나라 사건이 우선적 관심사가 되었다. 함께 모여 의논하고 타협할 공론장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이랬던 것인데, 해남군이 주민자치와 마을공동체를 담당할 과를 신설하고 주민참여형의 다양한 정책을 펼쳐내고, 주민이 주인 되는 세상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해나가기 시작했다.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다. 아직 충분하지 못하다는 걸 안다. 그러나 이미 발걸음을 떼지 않았는가. 늘 앞서가는 이의 걸음은 불안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목표가 주민의 마음을 향해 걷는 걸음이라면 결코 흔들리지 않아도 좋을 것 같다.

비슬안은 일찍이 농촌마을종합개발사업을 통해 농촌체험관과 습지생태단지, 편백산림욕장, 웰빙산책길을 조성했다. 생태농업을 시작으로 유기농단지 92ha도 조성하였다. 그러나 항상 허했던 것이 옛날처럼 서로 나누는 공동체 정신이었다.

지속가능한 농촌마을의 힘은 마을공동체이다. 비슬안 할머니들의 환한 미소가 해남의 각 마을로 퍼져나갈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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