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영상(전 전남문화관광재단 사무처장)

 
 

새로운 일을 할 때마다, 낯선 곳을 방문할 때마다 뇌리의 한구석에 저장돼 있다가 튀어나오는 7언 절구가 있다. '인생도처유상수(人生到處有上手)'다.

우리가 살아가는 곳곳에서 숨어 있는 많은 고수를 만나게 된다. 잠시 동안의 오만과 자만을 잠재워주는 그들을 통해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다. 북송 시인 소동파의 인간도처유청산(人間到處有靑山)을 약간 바꾼 글귀라 한다. 이웃 강진을 남도답사 일번지로 띄워버린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저자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이 책의 6권 부제목으로 등장시킨 것이다.

인간도처유청산은 사전적인 풀이로 사람은 뼈를 묻을 곳이 이 세상 어디나 있다는 뜻이지만 어떤 곳에서든지 살아나갈 수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확대해석하면 아무리 어려운 때라도 도와주는 사람이 어디나 있다는 말일 게다. 귀농, 귀촌이 화두인 지금의 우리 지역사회에서 곱씹어 볼 만한 절구다.

소위 '산전수전 공중전'을 다 겪었다는 은퇴자들의 귀촌이나 귀농 과정에서의 갈등도 그 지역, 그 분야의 '상수'들을 인정하면 해결될 일이다. '라떼는 말이야'라는 메뉴는 버리면 된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세상살이의 헛된 자만을 경계했다. 답사 중에 숨은 고수들을 만날 수 있으니 더 겸손하고 주의해야 한다고 강조했을 것이다.

어린 시절 마을 앞 들녘에서는 벼농사와 보리농사로 이어지는 이모작이 전부였다. 마을 뒷자락에는 유산으로 대물림되면서 서너 마지기로 쪼개진 밭에서 콩과 깨를 거두고 가을이면 김장배추와 무를 수확하고 월동용으로 마늘을 심었다. 나락과 보리는 농협수매를 통해 목돈을 만들고 밭작물은 대가족이 먹고 남으면 가용으로 쓰기 위해 오일장에 가져가 돈 샀다. 판다는 말 대신 돈 샀다고 표현했다.

지금 마을 풍경은 사뭇 다르다. 마을 들녘입구부터 비닐하우스 물결이다. 조금 외진 곳은 축사가 즐비하다. 논 작물, 밭 작물의 구분이 없다. 소출을 많이 낸다는 소문만 나면 몰린다. 널뛰기 농산물 가격에 고수는 없다. 유일하게 빅데이터 분석이 안 먹히는 분야다. 농산물 예측 모형도 빅데이터 전문가들의 공모전 출품작으로 끝난다. 통계청, 농림축산부도 뒷짐 진 지 오래다.

작물의 다양성은 상상 밖이다. 잡초가 특용작물이 된 지 오래다. 열대, 아열대 작물도 넘쳐난다. 애플망고, 파인애플, 바나나 등 동남아 관광지나 국내 유명 수목원의 유리온실에서나 볼 수 있었던 것이 동네 어딘가에서 재배되고 있다. 듣도 보도 못한 작물들이 소득작물로 각광받고 있다. 그만큼 작물재배의 고수들이 곳곳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주민자치의 바람이 거세다. 주민자치 분야 중에서 방과 후 돌봄을 고민하는 소도시의 경우, 할아버지와 삼촌이 마을교사가 되는 프로그램이 있다. 방과 후 아이들에게 마을과 환경에 대한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것이다. 향토역사에 대해 해박한 지식과 살아있는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거창한 스토리텔링이라는 단어를 끄집어낼 필요도 없다.

우리 주변의 도처에 상수들이 포진하고 있다. 구슬이 흩어져 있다는 얘기다. 이 구슬을 꿰어야 하는 것이 주민자치회가 할 일이고, 행정이 밀어줄 일이다. 결국 주민들이 나서서 살기 좋은 마을과 지역을 만드는 것이다. '인간도처유청산'을 믿고 귀농한 귀농인이나 '인생도처유상수'를 자처하는 마을과 분야의 고수들이 한 마음, 한뜻으로 뭉치면 될 일이다. 문제는 도처에 있는 '상수'들이 우물 안 개구리일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보다 한 수 위인 '상수'들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을 수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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