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기즈칸과 황칠

13세기. 아시아 전체가, 아니 거의 세계 전체가 ‘신의 재앙, 대전사(大戰士), 왕중왕'이라고 불리는 유일무이한 정복자로 인해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그가 바로 ‘한번 스치고 지나가면 생명의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그 빈자리에는 죽음의 그림자만을 드리우며, 자신 이외에는 그 어떠한 권위도 인정치 않았던 철저한 제왕’ 칭기즈칸이다.
온갖 오물이 쌓여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는 하수구로 들어가 목숨의 보존을 위해 더 깊이 오물더미 속을 향해 몸을 숨기는 사람들, 소문으로 익히 들어온 잔혹한 살상의 고통을 머릿속으로 그리다 못해 자결을 택하는 이들, 겁에 질려 흑빛으로 변해버린 아이들의 얼굴을 부여안고 죽음의 정복자에게 자비라는 단어가 어느 한구석에라도 존재하고 있기를 기도하는 어머니….
하지만 그 아비규환 속에서도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의 실체를 두 눈으로 확인하고자 마음먹고 마을 앞산으로 뛰어 올라간 당찬이가 있었다면 그는 실로 믿기 힘든 광경을 목격하였을 것이다.
마을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리는 척후병들의 말발굽이 일으킨 뿌연 흙먼지가 차츰 가라앉자 명주옷을 휘날리며 정복지를 향해 달려오는 10만 대군이 마치 검은 구름처럼 몰려온다. 검은 구름이 하늘을 덮은지 한참 후, 이번에는 80km에 이르는 ‘황금부대'가 그 거대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항상 전투태세를 갖춘 일만명의 기마대가 황금부대의 양쪽 측면을 보호하기 위해 길게 늘어서 있고 그 사이에는 그들의 4배쯤 되는 온 가족들, 4만마리의 군용마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양, 낙타, 염소들이 10만 대군에 의해 이미 황무지가 되어 버렸을 정복지를 향해, 새로운 보금자리를 향해 천천히 이동하고 있다.
겔(몽골인의 천막)에 누워 아무 걱정없이 쌔근쌔근 잠을 자는 갓난아기, 옷을 홀딱 벗고는 레슬링에만 정신이 팔려있는 꼬마들, 밥도 먹지 않고 놀고만 있는 아이를 찾으려 이리저리 돌아 다니는 어머니, 연료로 소중히 쓰일 낙타 배설물을 수집하는 노인… 황금부대의 행렬은 그야말로 움직이는 도시를 방불케 했고 그곳에는 거칠 것 없이 세계로 뻗어 나가는 몽골제국의 생명력이 그대로 녹아 있었다.
빈틈없는 전략과 전술로 무장된 많은 무사들이 새로운 정복지를 야심찬 눈매로 바라보고 있었지만 개개인의 정복욕이 그들로 하여금 초원으로부터의 그 기나긴 여정을 만드는 것은 아니었다. 움직이는 도시는 오직 한 사람을 앞장 세운 채 그만을 묵묵히 따르고 있었던 것이다. 회청색 늑대가 그려진 황금빛 깃발이 그를 향해 펄럭이고 있다. 황금색 옷을 입고 첫눈보다 더 눈부신 백마를 타고 있는 황금빛 피부의 사람. 그가 바로 문명과 문명, 위도와 경도를 넘나들며 자신의 세계제국을 구축했던 칭기즈칸이다. 칭기즈칸의 옆에는 그의 절대권력과 막강한 군사력을 상징하는 이동식 궁전인 오르도가 당당히 황칠의 찬란한 황금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런 연유로 그의 부대는 '황금부대'로 불리웠고 그의 발길이 닫는 곳곳마다 절대권력을 상징하는 황금빛에 모든 이들은 경외감에 머리를 조아려야만 했다.
1160년대에 아무것도 찾아 볼 수 없는 광활한 고비사막 초원에서 태어나 굶어 죽지 않기 위해, 얼어 죽지 않기 위해, 동족으로부터의 위협에서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누구보다 강하게 자신을 단련시켜야 했던 테무진이라는 소년.
그가 성장하여 칭기즈칸(강력한 통치자라는 뜻)으로서 전 세계를 호령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겨룰 상대가 없을 만큼 출중한 전투력을 갖췄던 기마병을 이끌었다 해도 문맹국(文盲國)의 지도자로서 금나라와 같은 문명국(文明國)을 다스리고, 나아가서는 아시아 전체와 유럽 동부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에 완전한 지배 체제를 구축하여 100여년 간을 지배했다는 사실은 역사적 미스테리로 남아있다. 이유를 불문하고 ‘칭기즈칸'이라는 이름 앞에서는 그 누구도 대항하거나 의심할 수 없는, 의심해서는 안되는 절대적 권력을 쌓아야 만이 인종과 종교, 언어가 다른 50여개의 국가를 다스려 나갈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칭기즈칸의 권력을 완성시킬 수 있었던 +α, 군사력을 뛰어넘는 +α는 무엇이었던 것일까? 그것은 바로 절대적 권위의 원천이자 상징인 존재를 찾아 만천하에 각인시키는 일이었다. 한반도의 43배에 이르는 엄청난 영토를 하나의 힘으로 집결시키고 있던 天子. 그가 가진 권력 응집의 원천이 바로 황칠임을 알게 된 칭기즈칸이 자신의 절대권력을 이뤄나갈 해답으로서 황칠을 자리매 시킨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천자로 하여금 무릎 꿇고 신하의 예를 갖추게 한 그가 아닌가? 그리하여 황금빛 의복에 황금빛 깃발, 황칠로 칠한 빛나는 이동식 궁전 오르도가 이끄는 황금부대는 그 모습만으로도 모든 이들에게 칭기즈칸의 위용을 나타내어 보는 이로 하여금 두려움에 떨고 복종하게 만들 수 있었다. 황칠은 권력을 찾아가지 않았다. 다만, 최고의 권력을 가진 자 라면 황칠이 자신을 나타내 주기를, 혹은 자신을 더욱 신비스럽고 절대적인 존재로 만들어 주기를 간절히 바랬던 것이다.
초원의 바람에 세계제국의 청사진을 실어 보냈던 대 정복자의 기개가 몽골 고원의 풀꽃처럼 사라져 버린 지금. 그의 못다한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황칠의 친정, 한반도 해남땅의 황칠은 오늘도 제왕의 가슴을 뿌듯하게 했던 안식향을 저 멀리까지 끊임없이 속삭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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