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률(교사)

 
 

최근 두어 군데서 들은 얘기인데, 외지인이 마을에 들어오려 할 때 마을 사람들이 면접을 하겠단다. 들어와서 갈등을 일으킨다나 어쩐다나.

'거주이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 봤을까? 헌법과 법률을 위반한다는 것을 그들은 알까?

그들의 생각을 아예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기존의 평화(?)로운 공동체에 어떤 갈등 상황이 있을 수 있다. 인정한다. 기존 마을 문화와 다른 도시문화에 익숙한 사람이거나 각기 다른 생각으로 살아가고 싶은 사람이거나 그 마을의 분위기와 다를 수 있다. 그렇다고 살겠다는 사람을 거부할 권한이 그들에게 있을까? 빗살무늬토기를 사용하는 21세기 신석기인들 흉내라도 내려는 것인가? 하긴 신석기인들이 그랬을 리 만무하지만.

새로운 사람들을 거부하는 건 안정된 권력을 유지하기 편해서다. 새롭다는 건 자꾸 덤비려는 속성이 있기 때문에 기존 체제를 흔든다. 이런 속성에 의해 변화가 온다. 이것을 변증법적 역사발전이라 하지 않는가?

이 어이없는 상황을 접하며, 문득 흥선군의 쇄국정책이 떠올랐다. 멸망해가던 조선 말과 쇠락해가는 농촌마을. 새로움을 거부하던 기득권과 새로움으로 밀려들던 신문명, 자신들(소수)만의 의사결정과 기득권을 지켜내기 위한 강성화, 급기야는 내부 분열과 점점 소수화로 이어지는 쇠퇴 과정, 충원되지 못하는 불임 세력, 생산구조의 몰락과 황폐화 등을 겪으며 멸망하는 모습이 말이다.

조선 말 쇄국정책은 결국 왕조의 멸망으로 이어졌고, 갖은 침략과 수탈로 민초는 피폐해졌다. 권력 상층부는 기회주의와 편가르기, 사대주의에 기대어 자신들의 욕망을 지키려 하였다. 그리고 일부 반역과 변절과 기회주의자는 외세에 기대 그 욕망을 이어갔지만 다수는 멸망했다.

지금 이 와중에도 그런 과정이 이어지고 있다는데 한 표 건다. 그런데 말이다. 이 시골 민초들마저 그래서야 되겠는가? 시골에 들어와 살겠다는 사람들을 보면 여러 사정이 있어 살던 터전을 떠나 귀향이나 귀촌이나 귀농 귀어를 하는 사람들이다. 그들 중엔 금의환향하는 극히 일부도 있겠지만 힘든 삶을 시골에 의지해 보겠다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게다. 그런 사람들에게 꼭 그래야 되겠는가? 맘에 들게 하겠다는 각서라도 써야 하는가? 맘에 들지 않게 하면 내쫓겠다는 굴욕을 주어 꿇려야 하겠는가?

우리 그러지 말자. 당신들도 어찌 보면 참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 아닌가? 속된 표현으로 '홀아비 마음 과부가 안다'고 하잖은가? 시골 농촌 삶이 힘들면 저항의 대상은 기득권이고, 기득권에게 저항해 평화를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누가 우리 농촌을 이렇게 힘든 곳으로 만들었는가를 생각해 보자. 최소한 지금 농촌에서 살아보겠다는 사람들은 아니지 않는가? 힘들고 힘없는 사람들끼리 쥐어짜서 그 알량한 기득권을 세워야 하겠는가?

어느 마을에선 집을 지어주고, 일할 수 있게 도와주며 자기 마을로 사람을 모신다고 한다. 그렇게 모시지는 못할망정 면접을 보고, 집을 구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건 정말 '거시기'하지 않은가 말이다.

우리 그러지 말자. 몰라서 잘못할 수도 있고, 알아도 끼지 못해 힘들어할 수도 있다. 천성이 나댈 줄 몰라 못하기도 하고, 상처로 마음을 못 열 수도 있다. 좀 봐주고 토닥여 줄 순 없겠는가?

마을에 사람이 사라져 가고 있다. 오겠다는 사람이 그저 귀하고 고마운 사람이 아닌가? 우리 함께 살자. 집도 내어주고, 텃밭도 짓게 하자. 우리 자멸의 길로 내닫지 말자. 쇄국은 오래전 부끄러운 역사다. '쇄마을' 하지 말자.

저작권자 © 해남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