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재걸(시인·전 언론인)

 
 

2022년 임인년(壬寅年)의 설날이 밝아오고 있다. 황소만한 검은 호랑이 한 마리가 오방색 아우라를 거느리고 뚜벅뚜벅 반도를 향해 자신의 거취를 서서히 드러내고 있다.

코로나가 창궐하고 있는 와중에도 우리 주변에선 유력후보들의 말들이 너무나 헤프게 난무하고 있다. 말을 많이 하다 보면 어느 누구라도 실언(失言)이라는 자기 함정에 빠져들기 십상이다. 머리께나 돌리고 말께나 한다는 정치인일수록 말실수의 단골손님인 까닭은 한 마디로 제 꾀에 제가 넘어간 탓이다.

한 치 앞을 못 보고 내뱉는 '경박성 다변화법'은 설화(舌禍)의 원인 제공자나 다름이 없다. 그래서 "말은 신중하게 하되, 가능하면 적게 하라"는 선인들의 경계야말로 말실수를 최소화하는 자기 수양의 지름길이라 하겠다.

같은 말이라도 언제(when), 어느 자리(where)에서 하느냐가 중요하다. 때와 장소를 제대로 가리지 못하면 '좋은 말'이 '궂은 말'이 되고 마는 경우가 적지 않다. 후보들이 너나없이 초조한 걸까. 생각 없이 무조건 내뱉고 보자는 조급성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얼마 후 치러질 후보들 간의 토론회가 자못 기대된다.

요즘 들어 설화의 주인공으로 곧잘 부상하고 있는 주요 정치인이나 그 주변 인사가 필부필부로서 한 말이라면 사회적 파장이 그렇게까지 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사회지도층 인사로 분류되는, 공인의 신분인 까닭에 전방위적 '감시의 눈'이 그들의 말실수를 결코 호락호락 넘어가주지 않은 탓이다. 따라서 공인의 반열에 오른 인사들이 각별히 유념해야 될 사항은 '언론을 상대로 한 일언일행(一言一行)은 곧 국민을 마주 대하고 하는 것과 똑같다'는 대(對) 언론수칙이다.

설화를 얘기할 때마다 으레 강조되는 것이 '말과 칼의 쓰임새가 너무나 똑같다'는 선인들의 경계다. '칼이 칼집을 벗어나면 더 이상 칼이 되지 못 한다'는 말을 한 번 더 음미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말 속에는 '칼이 칼집을 나오면 칼은 다만 흉기일 뿐, 칼이 지닌 또 다른 힘(권위)을 더 이상 발휘하지 못 한다'는 숨은 뜻이 담겨 있다. 그런 점에서 정치인을 포함한 언론인은 비정한 '칼의 철학'을 새삼 음미할 필요가 있다.

앞으로 40일 가까이 칼의 전쟁터를 누비며 '칼의 숲'을 헤쳐나가야 할 몇몇 후보들과 종군기자(?) 군단, 그들에겐 공히 촌철살인의 비수를 던져야 할 때가 있는가 하면, 크게 허공을 가르는 장검을 휘두를 때도 있으며, 양날을 지닌 검법에 대해서도 면밀한 대처가 있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닭 잡는데 쓸 칼, 소 잡는데 써서는 안 되는 '칼의 선별'에 대해서도 몇 번이고 더 각심해야 한다. 거기다가 '칼에 피가 묻어서는 안 된다'는 칼잡이들의 명언(銘言)은 고스란히 정치인이나 언론인이 새겨야 할 수칙으로 다가선다. 이 말은 곧 설화나 필화를 유발하지 않을, 빈틈없는 '자기완결성'을 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정객과 필객, 검객은 여러 면에서 닮았다는 생각이다.

설화의 주인공으로 부상한 어느 후보자가 '말이 곧 칼'이라는 생각을 진즉에 했더라면, 그래서 '입이 바로 칼집'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더라면, 그렇게 쉽사리 '경박성 다변화법'이라는 덫에 걸려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칼이 칼집을 벗어나면 더 이상 칼일 수 없는 '칼의 이치'와 말이 입을 한번 나오면 결코 주어담을 수 없는 '말의 속성'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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