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평호(북일면 주민자치회장)

 
 

죽을 때 털어버리면 아무 것도 아닌 검불에 불과한 문서에 목숨 걸고 사는 인생들이 많아질수록 세상은 척박해진다. 누구도 예외 없이 죽어서 흙으로 돌아간다. 행동하지 않고 숟가락과 문서만 들고 돌아다니는 검불 인생들에게 귀를 주면 그나마 가진 소쿠리도 없어진다. 귀는 두 개이고 입은 하나이다.

타인과의 소통, 그것은 경청하는 예의에서 시작된다. 내 것부터 내려놓는 자세가 바로 경청의 시작이다. 말하고 싶은 것은 많지만 내가 좀 참고 내려놓고 남을 먼저 배려하고 들어주면, 내 주변의 잡초밭은 하나둘 사라진다. 내 것은 온전히 보존하고, 남의 것은 무시하면 주변의 잡초밭은 점점 더 커진다.

귀는 친구를 만들고 입은 적을 만든다는 탈무드의 속담이 있다. 타인의 말을 입으로 듣고 귀에 담지 말고, 귀로 듣고 머리에 담으라는 말이다. 눈으로 보고 대화하라는 말이 있다. 진심인지를 보라는 뜻이다. 머리에 담지 않는 대화는 가슴으로 내려갈 일이 없다. 입에서만 맴도는 말은 생각 없이 지껄인다는 말이다. 그 말이 상대를 피곤하게 한다.

"여시아문, 나는 이렇게 들었다." 모든 불경의 시작이다. 듣지 않은 자기 주장, 현실에 참여하지 않고, 행동하지 않고, 입만 여는 대화는 우리를 서로 피곤하게 한다. 좋은 맛집을 찾아 식당에 가서 숟가락 타령을 하는 이들은 국맛을 모른다. 가격이 비싸면 맛이 더 좋다는 착각과 같다. 혀는 국맛을 알지만 혀의 주인은 나다. 숟가락 백 개를 쥐고 있은들 현실을 알겠는가. 남을 헐뜯거나 비방하는 마귀 같은 길은 피해야 한다.

말은 흩어지지만, 인생은 흩어지지 않는다. 흘러간다. 인생은 삶이다. 사람이다. 사람은 흘러 흘러 어디인가로 간다. 사람은 머물고 같이 살기도 하고, 정처 없이 떠돌기도 한다. 그것이 삶이다. 공동체를 이루고자 한다면 흩어진 말을 모으고 삶을 같이하는 대화가 중요하다.

"내 비장의 무기는 아직 내 손안에 있다. 그것은 희망이다."(나폴레옹) 희망을 품고 살기란 힘들다. 그러나 희망이, 그 꿈이 우리를 일으켜 세우는 마지막 탈출구이다. 상대의 희망을 짓밟는 몹쓸 짓이 바로 험담이다. 꿈을 이루고자 할 때, 거꾸로 가는 것도 좋다. 누군가에게는 규칙을 깨는 일탈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살고자 하는 절박함이다. 룰은 이미 만들어진, 행동이 완성된 형틀이고, 알을 깨는 행동은 형틀 너머의 세상을 찾는 혁신의 길이다. 풀이 우거진 땅도 누구인가 먼저 가고 모두가 따라가면 드디어 길이 된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Abraxas)." (데미안, 헤르만 헤세)

모든 대립물이 한 존재 안에 결합된 신이 아브라삭스이며, 아브라삭스는 기독교의 신과 사탄의 개념보다 더 고차적인 개념의 신이라고 한다. 현대어로 보면 '하이브리드' 신이다.

예수도 알을 깼다. 유대인의 기득권 세상에서 민중의 세계로 나오고자 알을 깬 것이다. 석가도 힌두의 기득권 세상에서 민중의 세계로 나오고자 안락한 알의 세상을 벗어난 것이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고드름은 거꾸로 매달려서 땅으로 향해야만 산다. 누군가는 거꾸로 간다지만 그것이 고드름의 길이다.

일반적인 관행으로 하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북일면의 작은 기적이 세상에 주는 울림은 거꾸로 가는 행동에서 비롯되었다. 안주하지 않고, 피곤함도 무릅쓰고, 틀을 깨고, 알을 깨고 나가는 그들의 행보에 해와 별과 달의 아브락사스가 함께하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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