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주승(전 전남평생교육진흥원장)

 
 

필리핀은 1960년대부터 기술혁신을 통해 획기적인 식량 증산을 달성한 녹색혁명에 성공했다. 1980년대에는 남아도는 쌀을 수출할 정도로 수확량이 늘어났다.

그러나 80년대 중반 이후 필리핀 정부는 쌀의 생산 증대보다 쌀 가격을 낮게 유지하고, 수입하는 쪽으로 정책을 바꾸었다. 농업 부문 투자는 절반으로 줄었다. 경작지는 감소했고, 쌀 생산은 정체되었다. 필리핀은 2000년대 들어 국제 쌀값 폭등의 직격탄을 맞았고, 지금은 세계 최대의 쌀 수입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정책 실패가 빚은 비극이다.

우리나라 사정은 어떨까. 낙관적이지 않다. 오히려 걱정스러운 부분이 많다. 식량 위기는 아시아나 아프리카 저개발국의 일만이 아니다.

우리의 곡물 자급률은 매우 낮다. 밀, 옥수수, 콩 등 주요 곡물의 95% 이상을 수입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곡물 자급률은 2019년 기준 21%로 OECD 국가 중 최하위이며, 이마저도 해마다 떨어지고 있다. 50여 년 전인 1970년 80.5%와 비교하면 급전직하가 아닐 수 없다. 하루 두 끼 이상은 외국 곡물에 의존하고 있는 셈이다.

현재 쌀(자급률 104.6%)만 자급자족하고 있을 뿐 보리(26.6%), 콩(6.6%), 옥수수(0.7%), 밀(0.5%)의 자급률은 심각하게 낮다. 한국은 세계 7번째로 곡물 수입을 많이 하는 나라다. 수입 국가도 일부에 편중되고, 곡물 메이저에 대한 의존도도 높다.

미래 식량 위기를 예측한 폴 로버츠는 저서 '식량의 종말'을 통해 "한가지 작물만 특화 생산하거나 식량 자급률이 떨어져 수입에 의존하는 나라는 향후 국제 사회에서 고립될 위험이 크다"고 경고했다.

미래학자들은 에너지와 식량 부족을 경고하고 있다. 특히 식량 생산량 감소와 곡물가 폭등은 불가피한 상황이라는 데 일치한다. 우선 인구는 늘어나고 경작지는 줄어든다는 점이다. 1804년에 10억 명을 넘어선 세계 인구가 1927년 20억 명에 이르기까지 무려 123년이나 걸렸다.

이후 1960년 30억 명까지는 33년, 1974년 40억 명까지는 14년, 1987년 50억 명까지는 13년으로 그 기간은 점점 단축됐다. 1999년 60억 명을 돌파하는 데에는 12년밖에 걸리지 않았고, 2011년 70억 명을 돌파했다. 2024년 80억 명, 2050년 93억 명에 이를 것으로 UN은 전망하고 있다.

둘째, 지구 온난화 등 기상 이변과 경작지 감소로 식량 생산량은 크게 떨어지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매년 600만ha(180억 평)의 농경지가 환경 변화로 인해 사막화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더 심각하다. 경지면적은 1970년 229만8000ha, 2010년 171만5000ha, 2019년에는 156만5000ha로 감소했다. 농가 인구도 1970년 1440만명, 2011년 296만5000명, 2019년 231만7000명으로 감소했다.

셋째, 중국, 인도 등 고성장 신흥 경제국의 식품 소비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육류 소비 증가로 인해 사료용 곡물 수요가 늘어나면서 식량 사정을 악화시키고 있다. 대두 수출국인 중국이 수입국으로 변한 것이 대표적 사례이다. 거대 메이저 곡물 회사의 횡포와 투기성 자금의 곡물 시장 유입으로 가격 폭등을 가열시키고 있다.

식량 위기는 최악의 경우 식량 전쟁으로 비화할 수 있다. 식량은 인류의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로 대체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식량 위기가 가시화되면서 러시아, 미국, 중국, 호주, 남아공, 아르헨티나 등 식량 대국들이 21세기 세계적 패권을 행사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 농업은 사양 산업이 아니다. 미래산업이다.

대통령 선거 정국이지만 농어업과 농어촌 관련 공약은 아예 실종 상태다. 농어촌의 인구 감소로 인해 정치적 영향력이 미미하다고 판단해서일까. 정치권의 각성을 촉구한다. 식량이 주권이고, 국가 안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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