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평호(북일면 주민자치회장)

 
 

"새로운 세계를 얻고자 하는 자는 알을 깨고 나와야 한다"(헤세)는 말이 있다. 결단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매 순간. 그것이 인생이란다. 그래서 "인간이 존경스럽다면, 그것은 매 순간 결단하기 때문이다."라고 알베르 카뮈는 말했다. 우리는 결단하지 못하고 칭칭 얽힌 실타래를 푼답시고 어영부영 살다가 대부분 그렇게 떠나간다. 묘비에라도 그걸 깨치고 쓴다면 다행이다.

결단하기 위해서 우리는 낯선 길을 가야 한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침묵할 것이다. 익숙한 길 위에서 자신은 변화하지 않으면서 입으로만 떠들어댄다고 상황이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모르는 것에 침묵하라 했다. 그것은 모르면 입 다물고 살라는 말이 아니라, 알지 못하는 것에 '언어' 장식을 많이 하여서, 말장난으로 사실의 진위를 현혹하지 말라는 말이다. 사실이 밝혀지기도 전에 오염되어 은폐되고 곡해되기 때문이다.

'道行之而成(도행지이성)'이라는 장자의 말처럼, 입이나 머리로만 떠들어 봐야 도는 이뤄지지 않는다. 도는 걸어가야, 그것도 경이로움을 찾아서 낯선 길을 걸어가야 이루어진다. 철학도 마찬가지다. 입이나 머리로만 하는 것은 철학이 아니다. 사실은 우리의 결단과 행동 속에서 철학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석가도 깨달음을 얻고서 우리 속에서 함께 나누어 가지고 살면서 진정한 부처가 되었다. 예수도 하느님의 계시를 우리 속에 나누어 가지며 생을 함께 하며 사랑을 실천했다.

도인도 부처도 신도 아닌 우리는 어쩌다가 틈만 나면 가벼운 입과 깨끗하지 않은 불신의 머리로 도를 깨트리고 불상을 부수고 십자가를 묻는 것일까. 모든 걸 내 중심으로만 해석하고 변화를 거부하는 자의 저항은 내가 폭삭 늙었음을 선언하는 바보짓이다. 알몸으로 부끄러움을 모르고 살았던 아담과 이브가 살던 낙원은 어쩌다 한낱 뱀 한 마리 때문에 파괴된 것일까. 낙원은 파괴된 것이 아니라 인간 세상이 드디어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낙원은 애초에 신의 장소였음에, 인간은 인간다운 세상으로 나온 것일 뿐, 슬퍼할 일도 그렇다고 기뻐할 일도 아니다.

"세상에 순응한 늙은이의 늙음은 세상의 규칙을 더 이상 바꾸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장 그르니에)는 말처럼, 그렇게 늙어가는 인생에 낯선 길은 내가 가진 길을 망가뜨리는 엉터리요, 저항하는 깃발이다. 그런 늙음의 세상은 일인 권력자의 통제된 길이다. 그리고 알을 깨는 따위의 행동은 불법이고 불손이다. 이들에게 청춘은 불장난 같은 어리석음이다. 그래서 미래는 과거와 현재의 자기를 쏙 빼닮아야 한다. 과거에 유폐시킨 미래가 가장 아름다운 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겐 과거의 통제된 독재사회가 존경스럽고 평화로운 것이다.

오늘 누가 "안녕"하냐고 묻는다면 늙은이는 "잘 있다"고 말할 것이고, 젊은이는 "불편하다"고 말할 것이다. 내가 가는 길이 비록 불편하고 낯설어도 나를 '우리' 속에 기꺼이 섞어서 같이 즐기고 산다면, 나만의 낙원에서 즐기지 않는다면, 비록 보잘것없는 세상처럼 보여도 그 안에서 무언가 공존과 배려의 아름다운 길이 만들어지리라. 내 비록 가진 것 없어도 기꺼이 그와 같은 젊은 바보를 만나러 떠나리라.

새로운 삶을 찾아 전국의 젊은 학부모들이 북일면에 모여들고 있다. 흥미로운 상황이다.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에 그들은 나섰다. 따뜻한 관심과 배려로 그들과 함께했으면 한다. 젊음의 농촌 생활, 그것이 농촌 유토피아가 아닐까. 거창한 깃발은 아니어도 그들의 길을 따라가고 싶다. 한 사람이 먼저 가고, 많은 사람이 따라가면 길이 된다.

저작권자 © 해남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