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은 더 오래 살다 갈 줄 알았다. 90살이면 천수를 누렸다고 할 수도 있지만 워낙 욕을 많이 먹은 탓에 덤으로 얹힌 목숨이 아주 끈질길 거라 여겼다. 하기야 한 살 아래의 노태우보다 2년 가까이 더 살았다. 두 사람은 바늘과 실의 관계이다. 전두환이 바늘이라면 노태우는 실이다. 육사 동기로 출발은 같았으나 군대의 숱한 보직과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줄곧 뒤를 따랐다. 이런 전철을 밟은 노태우가 마지막에는 앞서갔다. 불과 28일 간격이지만 먼저 저세상으로 떠났다. 그것도 박정희가 시해된 10월 26일이다. 우연의 일치인지 박정희,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 제삿날이 42년의 시차를 둔 한날이다.

80년 광주학살의 원흉인 전두환이 사흘 전 되돌아올 수 없는 저 멀리 가버렸다. 그가 저지른 5·18 당시 만행이 41년 하고도 6개월이 지났다. 생전의 그 숱한 요구와 기회도 걷어차 버리고 끝내 참회나 사죄의 한마디 남기지 않았다. 설령 사죄했다고 한들 별반 달라질 게 없다. 그가 자행한 학살이 없어지는 것도, 응어리가 풀리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광주'는 듣고 싶었다. '내가 큰 죄를 지어 정말 미안하다'라는 반성과 사죄의 말을….

전두환은 제11대와 제12대에 걸쳐 두 번이나 대통령을 해 먹었다. 광주학살을 자행한 지 3개월 만에 최규하를 대통령직에서 사실상 물러나게 한 뒤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해 당선됐다. 곧바로 헌법을 뜯어고쳐 이듬해 다시 대통령을 이어갔다. 그는 궤변과 거짓으로 광주를 두고두고 능멸했다. 그가 내뱉은 말을 곱씹어 본다. "억울하다. 왜 나만 갖고 그래"(1995년 내란혐의 재판), "광주는 총기를 들고 일어난 하나의 폭동이야"(2003년 언론 인터뷰), "이거 왜 이래"(2019년 재판 출석 때 발포 명령을 부인하느냐는 질문에), "광주하고 나하고 무슨 상관 있어?"(2019년 골프장에서 5·18 책임 질문에) 2017년 발간된 회고록에서도 책임질 일도, 잘못한 일도 없으니 사과할 일도 없다고 했다. 스스로 별을 달았듯이 면죄부도 스스로 준 것이다. 뻔뻔하고 가증스럽다.

전두환은 역사의 죄인이자 파렴치범이다. 광주를 핏빛으로 물들게 하고 국민을 상대로 온갖 반인륜적인 악행을 저지른 죄인이고, 그 죄를 뉘우치지 않고 끝까지 부인한 파렴치 인간이다. 뉴욕 타임스도 '한국에서 가장 비난받은 군사 독재자가 죽었다'라고 전했다. 그런 전두환의 평온한 죽음이 한 켠에서 착잡하게 다가온다. 그의 빈소에 성은(聖恩)을 입은 추종자만이 찾고, 정치권이 조문을 피한다고 말로가 비참하다고 할 수 있을까.

자국민을 학살한 세계의 많은 독재자의 말로는 말 그대로 비참했다. 리비아의 카다피는 시민들에 의해 사살됐고, 루마니아 차우세스쿠는 부인과 함께 총살됐다. 캄보디아 킬링 필드(Killing Fields·죽음의 들판)의 주범인 폴 포트는 밀림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피의 독재자'인 아프리카 우간다의 이디 아민은 사우디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 죽었다. 이에 비하면 부귀영화와 천수를 누리고 간 전두환의 말로는 사치스럽다고 할 수 있다.

전두환이 떠났다고 끝난 게 아니다. 그의 반역에 앞장서고 여전히 그를 추앙하는 자들, 이른바 5공 실세들이 거리를 활보하며 그를 신주 모시듯 하고 있다. 이는 우리 역사에서 친일파 청산에 실패했듯이 12·12 쿠데타, 광주학살이라는 반란과 내란, 살인에 대한 단죄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여전히 진실이 갇혀있는 미완의 5·18은 우리나라 현대사의 부끄러움이자 수치이다. 그래서 5·18은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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