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춘(법무법인 클라스 대표 변호사)

 
 

변호사들이 일하는 법무법인의 업무는 법원의 재판절차에서 의뢰인을 위하여 소송행위를 대리하는 업무인 송무업무와 송무의 전후 단계에서 분쟁에 대한 대비 또는 예방을 위하거나 분쟁 상태에서의 대응 방안 마련을 위하여 조언을 해주는 자문업무가 대부분이다.

아무래도 법관 재직 경험이 있는 변호사들은 민사사건의 준비서면 등이나 형사사건의 변론서 등을 작성하고 법정에 출석하여 변론을 수행하는 송무업무의 비중이 크다고 할 수 있지만, 사회의 발전에 따라 경제활동에서 필연적으로 초래될 수밖에 없는 법적 분쟁에 대한 사전 대비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높아져 자문업무에도 많이 관여하게 된다. 

그러한 자문업무 중에는 소송에서 서면의 중요성 때문에 계약서 내용의 검토가 대부분이다. '팍타 순트 세르반다(pacta sunt servanda)'는 계약은 지켜져야 한다는 뜻의 라틴어 법언(法諺)으로, 근대 민사법의 대원칙이다. 법적 분쟁의 대부분은 바로 계약의 위반 여부와 위반 당사자가 누구인지를 두고 일어나므로 계약 내용이 화체된 서면인 계약서는 현대 민사소송이 서면증거를 거의 절대적 우위에 두는 것과 맞물려 대부분의 송사에서 쟁점의 중심에 놓인다. 

대법원이 발간한 2021년도 사법연감에 의하면, 법원에 접수된 2020년도 민사본안사건은 모두 101만2837건(이 중 제1심 92만6408건, 제2심 6만4994건, 상고심 2만1435건)인데, 이들 사건의 대부분이 계약서의 내용과 그 해석에 대한 다툼에 기인한 것이다. 계약서가 어떤 목적으로 형식적으로 작성된 것으로서 실제의 계약 내용은 문면의 내용과 다르다며 계약서의 내용 자체를 부인하는 사건도 있다.

이처럼 계약서의 내용의 진위나 그 의미가 문제되는 경우에 대한 우리 법원의 확립된 입장은 계약서의 작성 자체가 인정된다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그 계약서의 문언적 내용과 같은 계약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고, 이러한 판례들에서는 예외 없이 '특별한 사정'이 있다면 계약관계를 계약서의 문언대로 인정하지 않을 수 있음을 명시하였으면서도 정작 그러한 '특별한 사정'이 충분히 증명된 경우에도 좀처럼 위 판례들이 천명한 예외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필자도 이러한 예외적 법리의 적용을 기대하고 상대방의 배신적 행태로 매우 억울하게 된 의뢰인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여 그러한 '특별한 사정'을 충분히 증명하였음에도 지방법원에서 배척당하였다가 겨우 고등법원에 가서야 어느 정도 받아들여져 마음고생을 한 적이 있다. 그동안의 재판 경험에 의하면 서면의 증명력을 절대적으로 인정하는 프랑스 등처럼은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 법원도 쌍방이 자의로 서명하거나 날인한 계약서가 있다면, 비록 판례에 의하면 예외가 인정될 수 있음이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계약서의 내용을 그대로 인정하는 외에 다른 판단을 하는 경우는 없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기업 간의 복잡한 사업 관련 계약서는 말할 것도 없고 토지나 주택 등 건물의 매매계약 등 일상에서 자주 일어나고 당사자 사이의 개인적 신뢰관계가 있는 경우도 빈번한 일반적인 계약에서도 계약서의 사전 검토가 얼마나 중요한지와 진정한 합의 내용과는 다른 계약서는 어떤 목적으로도 절대 작성하면 안 됨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심지어는 초안에서는 있었던 위약금 조항이 최종 작성 단계에서 한쪽 당사자의 불순한 의도로 슬쩍 삭제되고, 상대방이 이를 간과하여 낭패를 본 사례도 있다. 최종 서명이나 날인을 하는 순간까지도 긴장을 풀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최근 작은 토지의 매매계약서에 대한 자문을 위하여 웬만한 소송사건을 수행한 이상의 수고와 시간을 들인 일이 있다. 매도인이 계약 조항에 대한 의문 제기를 계속하고 자구 하나까지 꼼꼼히 살피고 체결에 동의하였다가도 다시 또 보완을 요청하는 일이 반복됨에 기인한 것이었다. 우리 사회도 계약서의 문언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한 깊은 인식이 보편화 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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