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평호(농부)

 
 

인간은 태어나서 꼭 죽는다는 불멸의 원칙이 있다. 이 불멸의 법칙을 무시하고 불사의 신이 되려는 인간들이 그동안 꽤 많았다. 그리고 현재도 많은 사람들은 불사의 환영에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며 살고 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 그것은 삶의 분명한 한 축이다. 피해 갈 수 없는 과정이다.

죽음의 부작용, 죽은 사람이 누구에게 부작용을 일으킨다는 말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실상은 죽음에 이르는 당사자가 겪는 부작용을 말한다. 아무 생각 없이 살아오다가 죽음에 이르는 나이가 들었을 때, 죽음을 피하고자 부질없이 오래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을 보면 안타깝다.

늙어온 과거를 뒤돌아보지 않고 청춘인 양 '인생은 70부터', '인생 백세' 등 허울 좋은 말을 내세우며 억지로 무언가 욕심을 내며 죽음을 회피하려는 이들에게는 죽음의 부작용이 뒤따른다. 살아온 과정을 천천히 뒤돌아보며 자신의 과오와 축적된 삶의 궤적을 뜯어보며 하나씩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살아온 세상에 되돌려 주는, 스스로 만든 쓰레기들을 분리수거해서 깨끗하게 치워주고 가려는 모습, 그런 자세가 아름다운 것이다. 늙어서도 무언가 욕심을 내며 또다시 쓰레기를 만들려는 모습, 참으로 추하다.

삶은 순간의 연속이고 모든 순간은 끝을 향하여 가게 된다. 그래서 삶과 죽음의 경계선은 허망하다. 삶은 본인 의지와 상관없이 시작되고, 삶의 끝을 모른 채 마감하는 것이 인생이다. 죽음의 자리는 여러 가지로 차별이 있지만, 죽음은 누구에게도 공평하다. 돈 많은 재벌이라고 죽은 뒤 다시 몇 년 더 살게 해주는 반칙 따위는 절대 없으니까. 천당을 가든, 극락을 가든 모두 죽음 뒤에 나오는 현상이다. 현생의 더러운 궤적은 모른 채 하면서 이생의 편안함에 극악스러운 몸짓을 한들 남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억지로 죽음 후의 일을 만들려 한다든가, 죽지 않으려고 억지를 부리는 모습은 주변에 수없이 많다. 조용히 인생의 여정을 정리하기보다는 나의 후손을 위해 또다시 발버둥 치는 모습은 죽음의 부작용이다. 죽음을 곱게 받아들이지 않고 나의 소유물을 계속 이어지게 하려는 욕심은 기실 죽은 이가 산 자에게 건네는 소유에 대한 병적 집착증이다. 건강한 정신은 아니다. 깨끗한 죽음, 건강한 죽음을 보여주려는 자세가 아름다운 인생이다. 신체의 건강함도 중요하나 정신의 건강함이 더 중요한 것이다.

잘 산다는 웰빙(well living)이라는 말이 있듯이, 잘 죽는다는 웰다잉(well dying)이라는 말도 있다.

준비된 죽음은 아름다울 수 있다. 그리고 아무런 부작용도 남기지 않을 수 있다. 죽음은 돈으로도, 그 어떤 권력으로도 막을 수 없다. 세상에 대한. 사람에 대한 사랑만이 그 부작용을 치료해주는 약이 될 수 있다. 돈과 물질에 대한 집착은 죽음을 부끄럽게 만든다. 움켜쥐고 버릴 줄 모르는 삶, 죽음을 모르는 병을 앓다가 인생이 끝난다.

굴러떨어져도 좋으니 돈을 만지겠다고 우기면, 돈이 들어오는 대신 나를 추락시키고, 다른 사람과 덜컹거리게 사는 길로 끌고 간다. 돈은 그 돈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에게만 공손하게 들어온다. 억지로 돈을 부른다고 돈은 오지 않는다. 억지 부리면 돈은 사람을 해친다. 부유함과 가난함은 비교할 때만 구분된다.

대가족으로 살며 신문 쪼가리 손에 들고 뒷간에 줄 서서 살던 아침이 그리운 건 돈 냄새가 아니라 사람 냄새 때문이다. 사람은 뒤돌아볼 때 어른이 되어 간다. 죽음의 부작용도 돈의 비린내도 사라진다. 자본주의 세상에서 인간답게 산다는 건 자신의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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