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거섭(해남군농민회 정책실장)

 
 

완연한 가을에 접어든다는 백로가 지나면서 높은 하늘에 뭉게구름이 솜사탕처럼 떠 있는 청명한 가을 하늘을 기대할만한 계절이 찾아왔다. 그러나 하루가 멀다 않고 내리는 비는 그런 호사스런 기대를 허락하지 않는다.

배추를 심기 위한 과정은 8월 중순부터 밭둑의 풀을 베고 정식을 하는 10~15일 전에 석회를 살포하여 경운작업을 하면서 시작된다. 이때부터 농촌 들녘은 본격적인 농번기로 접어들지만 비가 자주 내리는 시기라 날씨와 한판 승부를 해야 하는 농민들에게는 아주 고단한 시기이다.

며칠 전인 5일도 아침부터 아주 약하게 비가 내리더니 오후에는 제법 굵은 비가 내리고 있다. 어제 오후부터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것 같은 잔뜩 찌푸린 날씨였다. 농민들은 더 다급해지고 근심은 깊어졌다.

들녘 곳곳에서 트랙터들이 숨이 넘어갈 듯한 굉음을 내며 이 밭, 저 밭을 누비며 농민들의 다급한 마음과 근심을 덜어 준다. 경운작업을 하고 석회와 퇴비를 뿌리고, 밑거름을 뿌리고, 살균제를 뿌리고, 비닐을 씌우고, 스프링클러를 설치하고, 관수장치 시험가동까지 마쳐야 배추를 정식할 수 있기에 정신없는 하루를 또 보내고 있다. 배추 정식을 위한 모든 과정을 마친 밭에는 비가 와도 배추 심는 일을 농민들은 멈추지 않았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농민들이 계획한 일정대로 되는 경우가 별로 없다. 특히 비가 가장 큰 '복병'이다. 빗물이 땅속까지 스며들면 최소 2~3일은 밭에 들어가 일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농민들은 비가 또 오기 전에 배추정식 준비를 마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모든 농작물이 그렇듯이 배추 또한 심어야 할 시기가 있다. 그 시기를 놓치면 작황이 좋지 않아 투자한 돈은 한 푼도 못 건지고 힘들었던 시간과 노력은 헛수고가 되고 만다. 농작물은 농민들의 노력과 자연의 힘이 조화롭게 작용해야 잘 자랄 수 있다. 인력과 인건비 문제 또한 농민들을 힘들게 한다. 해남의 배추재배 면적이 4500~5000ha 정도 되는데 짧은 기간에 일손이 필요하니 인력난과 인건비 문제가 동시에 발생하는 것이다.

그래도 올해는 비가 자주 내려 고구마 캐는 일이나 다른 농작업들이 분산되고 배추밭 또한 정식준비가 길어지면서 두 가지 문제가 동시에 해결된 점도 무시하지 못할 것 같다. 코로나로 인한 외국인 인력수급 문제, 고구마 캐는 시기와 배추를 심는 시기가 겹치는 등의 이유로 인건비가 많이 올라갈 것을 염려했었다. 그렇다고 지금의 인건비가 농가에 부담을 주지 않는 것은 아니다. 요즘 외국인 인부들의 일당이 13만~14만원에 이른다. 여기에 일부 알선업자들은 웃돈을 요구하기도 해서 농가들의 부담을 가중시키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저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농민들은 붉은색의 황토밭에 하얀 줄을 긋고 한 점, 한 점, 푸른 점을 찍어 놓았다. 이제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나면 들녘은 온통 푸른빛으로 번지고 황홀한 장관을 연출하겠지만 농민들은 또 다른 근심에 마냥 좋을 수만은 없을 것이다.

배추를 심는 일을 포기한 농민들도 있겠지만 크게 상심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오히려 복이 될 수도 있다. 매년 늘어나는 중국산 수입김치는 김치 종주국으로서의 위상을 위태롭게 하고 코로나19는 소비 부진으로 이어지고 있는 현실이다, 없는 돈을 투자하고 피와 땀으로 가꾼 배추를 좋은 가격을 받을 것을 낙관할 수만은 없게 하기 때문이다.

해마다 궂은 날씨와 인건비 등 모든 힘든 조건들을 이겨내고 광활한 대지 위에 푸른 물감을 뿌리듯 아름다운 경관을 보기 좋게 연출하는 농민들에게 올해는 일한 만큼의 소득이 있었으면 하고 바란다. 그래서 피와 땀으로 얼룩지고 근심 가득했던 농민들의 깊게 팬 주름이 펴지고 환한 미소를 지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한 가닥 희망을 가슴에 품고 내일을 위한 씨앗을 준비하고 대지를 갈아엎고 광활한 대지 위에 생명이라는 싹을 틔우게 하는 위대한 농민들에게 벅찬 가슴으로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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