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광주에 '우다방'이라는 게 있었다. 차 마시는 다방이 아니다. 한때 광주에서 가장 번화가인 충장로2가 사거리에 위치한 광주우체국(현 광주충장로우체국)의 애칭이다. '시원한 여름과 따뜻한 겨울'을 선사하는 우체국 객장이나 우체국 앞을 흔히 우다방이라고 불렀다.

젊은 시절 광주에서 생활한 적이 있다면, 나이 40대 이상은 누구나 한 번쯤 우다방을 이용했을 것이다. 개인 간 통신수단이 거의 없던 70~90년대에 '시내에서 만나자'고 하면 선뜻 떠올리는 약속 장소가 바로 우다방이다. 지금도 그곳에 가면 길바닥에 '우다방'이라고 적힌 근석(根石)을 만나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근대적 의미의 다방은 일제 강점기에 뿌리내린다. 연예·예술·문인들의 아지트로 자리잡은 것이다. 6·25전쟁을 겪은 50년대 놈팡이(하릴없이 노는 남자)의 무대이기도 하다가 60년대 들어 지식인들의 만남의 장소로 위상이 올라간다. 70~80년대에는 DJ(Disk Jockey·음반으로 음악을 진행하는 사람)가 등장하는 음악다방이 가세하면서 '다방문화'가 꽃피게 된다. 담배 연기 자욱한 다방은 사업가에게 사교나 업무의 장소로, 젊은이에게는 연애나 우정의 장소로 단연 1번지였다. 누구나 다방 문턱이 닳을 정도로 들락거린 시대이다. 해남읍에만 다방이 40개 이상 번성했던 시기도 이때일 것이다.

90년대 들어 중장년층의 휴식처로 명맥을 이어가다 자판기가 보급되고 커피전문점이 생겨나면서 다방은 점차 설 자리를 잃게 된다. 2000년대에는 카페나 커피전문점이 아예 그 자리를 꿰찬다.

벽에는 으레 그림 한 점 내걸렸던 다방은 추억 속으로 사라졌다. 언제부턴가 다방이라는 이름을 내건 '티켓다방'이 시골마을을 무대로 성행한다. 티켓다방은 사전적 의미로 일정한 시간 단위로 티켓을 끊은 사람에게 차를 파는 곳이다. '티켓을 끊는다'는 것은 '시간을 같이 보낸다'는 의미에서 따왔다. 그래서 티켓다방 종업원은 커피와 차를 배달하거나 노래방, 술집에 동행하고 때로는 성매매에 나서기도 한다.

송지의 한 티켓다방 종업원을 매개로 한 코로나19가 걷잡을 수 없이 퍼지면서 조용하던 해남이 발칵 뒤집혔다. 송지는 상주인구 6000명과 외지 노동자를 포함하면 7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생활무대이다. 해남에서 가장 큰 면이자 브랜드인 '땅끝'의 본산이기도 하다.

송지를 두고 '개도 1만원권을 물고 다닌다'는 어찌보면 허접하기도 한 말이 나온다. 전복이나 김 양식 등을 기반으로 해 돈이 잘 굴러다닌다는 세간의 실태를 빗댄 것이다. 그래서인지 14곳의 다방에서 70명 넘는 종업원들이 몰려있다. 해남에 있는 다방의 세 곳 중 한 곳은 송지에 있는 셈이다. 한때 이곳의 다방은 20곳을 훨씬 웃돌았다. 면 단위에서 드물기만 한 주점이나 노래방 등 유흥업소도 넘쳐난다. 유흥업소 종업원은 특성상 여느 업종보다 물갈이가 심하다. 주변은 그만큼 코로나 감염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 진원지로 주목받는 종업원도 부산에서 왔다고 한다. 서울에서 온 어느 종업원은 '송지에 가면 돈 많이 번다고 해서…'라고 했다. 땅끝의 돈 냄새(?)가 서울·부산까지 퍼진 모양이다.

해남이 뜬금없는 티켓다방으로 '코로나 눈물'을 흘리고 있다. 이참에 고름을 짜내고 새살이 돋는 치유책이 필요하다. 우리 속담에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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