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1948년 영국 런던에서 열린 제14회 하계올림픽에 처음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이전의 제10회 미국 LA올림픽(1932년)에 김은배·권태하(권투에 황을수 출전), 제11회 독일 베를린올림픽(1936년)에 손기정·남승룡이 마라톤에 출전했지만 일장기를 달고 뛰었다. 당시 나라를 잃은 일제 치하에서도 '올림픽의 꽃'이라는 마라톤 대표 선발전에서 1, 2위를 차지하자 경성(서울)이 떠들썩했다고 한다.

4년마다 열리는 올림픽에서 줄곧 변방 신세를 면치 못하던 우리나라는 1976년 제21회 캐나다 몬트리올올림픽에서 양정모(레슬링 자유형)가 금메달을 따면서 처음으로 올림픽 무대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이 대회를 기점으로 주요 반열에 올라 1988년 제24회 서울올림픽을 개최하기에 이른다. 서울올림픽에서 금메달 12개로 4위를 기록한 이후에도 단 한 차례(2000년 시드니 올림픽 12위)를 빼면 10위권 이내 성적을 올렸다. 이때까지만 해도 금메달 수가 곧 국력의 척도이자 국위 선양의 잣대로 받아들였다. 지난 8일 폐막한 제32회 도쿄올림픽에서는 금 6개, 은 4개, 동 10개로 종합 순위 16위(금메달 수 기준)로 내려앉았다.

이번 도쿄올림픽은 스포츠 분야에서 우리의 의식 세계를 지배했던 맹목적 국가주의나 국수주의 사슬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는 변곡점이 됐다. 국가 간 스포츠 대결에서 나타나는 국가주의나 국수주의는 애국심과 전혀 다르다. 국가 간 갈등이나 경쟁, 우수성을 과시하는 도구로 삼으려는 저의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를 부추긴 어느 공영방송의 중계 행태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올림픽 최초로 3관왕에 오른 안산(양궁)을 비롯한 메달리스트들은 국민에게 기쁨을 선사하며 큰 박수를 받았다. 여기서 주목되는 부문은 메달권에 진입하지 못한 선수도 격려의 박수와 응원을 한껏 받았다는 점이다. 여느 대회에서 쉽게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현상이다. 김연경이 이끈 여자 배구를 비롯해 육상 남자 높이뛰기 우상혁, 다이빙 남자 우하람, 근대5종 정진화 등 '감동의 4위'가 그들이다. 우리나라는 이번 올림픽에서 12개의 4위를 기록했다.

메달 턱밑에서 멈춘 4위에도 국민은 왜 박수를 보냈을까. 그들이 쏟아낸 피땀과 투혼, 멋진 경기력에 감동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전의 올림픽에서 4위에 그친 선수들은 투혼을 발하지 않았을까. 물론 아니다. 달라진 점이 바로 국민의 인식과 분위기이다.

똑같이 4위에 오른 야구는 비슷한 맥락에서 국민적 공분을 샀다. 사실 야구는 올림픽 출정 이전에 미운털이 단단히 박혔다. 코로나19 방역수칙을 어기면서 호텔에서 술판을 벌였기 때문이다. 이런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참가한 올림픽 경기에서 좀체 투지를 찾을 수 없었다. 이런 차에 동메달 결정전에서 껌을 질겅질겅 씹는 선수의 모습에 몰매가 쏟아졌다. 융단폭격식의 비난이 바람직하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이들은 왜 팬들의 눈 밖에 났는지를 곱씹어봐야 한다. 그들은 프로이다.

이번 올림픽을 지켜보면서 이젠 일등만이 박수를 받는 성과 지상주의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된다. 일등은 다른 사람을 밟고 넘어서는 것이다. 반면 일류는 자신을 밟고 넘어서는 것이다. 일등은 한 명에 그치지만 일류는 모두가 될 수 있다. 일등이 반드시 일류가 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일등보다는 일류를 지향해야 한다. 신체(경제력)와 정신(마음)이 함께 성장해야 한다. 그게 우리가 꿈꾸는 진정한 선진국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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