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년째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
"내 인생이 담겼다"

▲ 이병춘 옹이 일기장을 보여주고 있다.
▲ 이병춘 옹이 일기장을 보여주고 있다.
▲ 뒤편 서랍장은 50권 가까운 일기장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 뒤편 서랍장은 50권 가까운 일기장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午前(오전) ○○○치과에 들러 치 손좀 보고 明日(내일) 食後(식후) 다시오라. 80,000원 지참 "요". ○○철물점에 들러 펜치(大) … 6,000원 지불. 고도리 농협에 들러 통장 확인(잔고가 ○○○원). 택시 대절 집에 옴. 午後(오후) 邑(읍)에 가면서 택시 대절 ○○이발소에 들러 이발함. 15,000원'

이병춘(85·해남읍 학동) 옹의 지난 26일자 일기 내용이다. 이 옹은 29살이던 65년부터 지금까지 57년째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를 쓰고 있다. 한글과 한자가 섞인 일기는 때론 한 장을 빼곡히 채운다.

"영농에 도움이 되기 위해 시작한 일기가 습관이 되어 이젠 일기를 써야 잠이 와. 언제 씨를 뿌리고 수확했다는 농사 이야기에서 누구를 만났다거나 가정사, 마을에 있었던 일들을 적어. 나의 모든 게 일기장에 있어. 근디 내가 죽은 뒤에 후손들이 한 번이라도 볼까 의심스러워."

25살에 결혼한 아내(신정순·81)와 60년째 동거동락하면서 일기를 쓰는 게 하루의 큰 보람이자 위안거리이다.

이 옹은 지금의 집이 태자리이지만 유년 시절에 일제의 징용을 피해 중국으로 건너간 부친과 살다가 적응이 안 되어 홀로 고향으로 돌아왔다. 조부모 밑에서 자란 그는 대농을 일구며 적극적인 사회활동을 해왔다.

"젊어서 논 70마지기(1만4000평) 농사를 지으면서 소가 5마리나 있었어. 읍 구교, 관동, 학동, 용전과 마산 복평에 우리 논이 널렸어. 지금은 다 없어지고 밭만 있어. 학동 서림공원 자리에서 도정공장을 했는디 손해만 봤지. (돈 많이 벌었다는 질문에)공장 기계소리가 날 때야 돈 벌지만 소리가 안 나면 망하지."

이 옹에게 지금도 기억에 남는 생생한 일들이 많다. 80년 1월 1일 마을총회에서 새마을운동 지도자로 위촉되어 24년간 줄곧 새마을 활동에 전념했다.

"당시만 해도 새마을 운동은 안 들어가는 게 없이 모든 걸 했지. 해남군에서 우수부락으로 선정되어 해마다 600만원의 지원금도 받았어, 마을회관 문고에 책만 2000여 권에 달했지. 칭찬도 많이 받았고 다른 마을에서 견학도 많이 왔어."

30대 중반에는 태극기 보급에도 앞장섰다. 당시 513개 마을을 돌며 주민들에게 직접 태극기를 나눠준 것이다. 그가 보급한 태극기가 1만3000개를 넘는다. 사비를 들여 태극기를 보급했지만 할 일 없이 태극기 장사나 한다는 소리를 듣고 속상하기도 했다. 환경운동도 했다. 해남군 명예환경감시위원회 회장을 맡아 생활주변이나 관광지, 해수욕장 등을 돌며 환경 파수꾼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친 것이다.

이 옹은 여전히 젊게 살아가려고 노력한다. 지금도 인생에 도움이 되는 격언을 종이에 적어놓고 음미한다.

'의심 난 사람은 쓰지 말고 쓰는 사람은 의심을 하지 말라, 사람은 한 번밖에 살지 못한다. 고로 베풀라. 내가 좋다고 내뱉는 말이 상대방의 가슴 속에 못이 된다는 것을.' 그가 아끼는 금언(金言)이다.

"몸은 늙어가더라도 마음만은 젊게 살고 싶어. 일기 쓰는 것도 보통 정신으로 어려워. 나이 먹어가면서 기억력이 흐릿해지나 일기가 기억을 대신해줘." 이 옹은 치아가 없어 발음이 명료하진 않지만 앞으로 계속 일기를 써나갈 정신 건강은 여느 젊은이 못지않다.

저작권자 © 해남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