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평호(농부)

 
 

감히 신의 불을 훔쳐서 인간에게 전파했던 프로메테우스, 제우스로부터 노여움을 사서 알코올 중독이 되어 간으로 고생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고 생각되는 프로메테우스, 그가 바로 인간의 원형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인간이 그립다.

용감한 자만이 인간이다. 신은 용감하지 않다. 태생부터 용감할 필요가 없으니까. 인간은 용감한 행동을 함으로써 자신의 원형을 보게 된다. 아담도 신이 만들어준 낙원에서 금지된 사과를 먹었기에 비로소 인간 대우를 받았다. 소소한 두려움에 자기를 잃고 사는 모습을 보면서도 현재의 굴복을 한시적으로, 자위적으로 합리화하는 청춘들은 인간의 원형을 알기는 할까.

이런저런 이유로 자신으로부터 멀리 소외당한 그 자신을 소환하고, 자신을 직접 대면하는 청춘의 프로메테우스가 되어보면 어떨까. 그것이 당당한 아름다움이며 용기이며 진정한 자유의 삶이 아닐까. 청춘은 나이가 아니다. 늙어가면서 익은 자는 늘 청춘이다.

세상을 바꾸고 싶고, 인생을 바꾸고 싶거든 자신을 먼저 바꾸어야 한다. 자신이 바뀌지 않으면 세상은 결코 바뀌지 않는다. 그리고 당장 불을 훔쳐라. 프로메테우스를 알면서도 그런 이에게 뒷담화하는 행동은 자신을 죽이고 굴종의 삶을 일구는 짓이다.

삶의 굴종은 자신이 굴복했기 때문에 추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영혼을 팔아넘겼기 때문에 역겨운 것이다. 당당한 삶은 자신이 자기의 주인일 때 시작된다. 아름다운 인간의 정의로운 감성을 훔치고 훈육된 이성을 버려야 자신의 눈을 가지게 된다. 그 안에서 비로소 인간 공존 시대가 열린다.

신이 되려 하지 말고, 황제가 되려 하지 말고 이름 없는 인간이 되어, 불도 훔치고 고생도 하고 실패도 하면서 나아가는 인간, 그것이 아름다운 모습이다. 타인에게 교훈을 줄 수 있는 인간은 성공한 자가 아니라 실패한 자이다. 성공은 이미 배울 것이 없는 상태로 도태된 것이다. 도전이 끝난 것이다. 1%의 성공 신화를 쓰고자, 1%의 무지개라는 허상을 쫒느니, 인생을 낭비하고, 공동체를 깨고, 자신을 잃어버린 삶을 사는 신 같은 존재가 되느니 차라리 고통받는 프로메테우스 같은 인간이 참된 삶을 살았다고 본다.

나이만 청춘의 무늬를 한 사람들과 대화가 길어진다 싶으면 바로 튀어나오는 말, 당신은 꼰대이고 하나마나한 말을 계속한다고. 말 한마디로 손절 당한 기분은 알고 그럴까. 오만이 무엇인지도, 편견이 무엇인지도 알려 하지 않는다.

이런 청춘들에게 한마디 해주고 싶다. 너희는 시간을 태우고 있을지 모르나 나는 얼마 남지 않은 삶을 태우고 있다. 너희는 나이를 먹어는 봤냐. 저녁노을처럼 빨갛게 태우고 가련다. 도대체 고민은 해보았느냐. 거대한 악에는 침묵하고, 사소한 말에는 상처 입었다면서 거품을 물며 길길이 뛰는 너, 네가 지금 하는 짓은 미래의 늙은 너를 밟는 자신이다. 바로 당신, 갖다준 그 불조차도 꺼버리고 다시 신이 되려고, 바보같이 혼자만 1% 되려고 오늘도 뛰기만 하는 너, 너는 누구세요? 한 번쯤은 물어 보라. 자신에게.

세상은 빛나는 별만 있는 것이 아니다. 빛이 나지 않고 관심 있게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별, 그것을 포말하우트라고 부른다. 그 별이 없으면 우주의 좌표도 찍을 수 없고 별의 위치조차도 구분할 수 없는 것이 우주의 세계이다. 세상은 포말하우트가 있기에 존재한다. 스타는 만들어지고 사라지지만, 포말하우트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저 거기 있다. 이름 없이 살다가 누가 보든 말든 자기 자리를 지키는 무수히 많은 별, 그것이 우리의 인생이요, 아름다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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