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평호(농부)

 
 

'Pardon?', 용서라는 의미에서 'par'를 빼면 'don'이 남는다. 좀 떨어져 준다는 말이고, 기부 즉 'donation'의 뜻이 된다. 그래서 용서는 준다는 의미이다. 무엇을 준다는 말일까.

철학자 데리다는 피해자가 가해자의 간절함, 즉 용서받고자 하는 그 마음을 보듬어 주는 것이라고 보았다. 우리는 늘 주면서 무언가를 얻어 가진다고 본 것이다. 골프에서 'par'라는 말은 기준이라는 뜻이고, 기준을 채우면 점수를 잃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의 기준에 맞게 주는 기부, pardon은 바로 용서인 셈이다. 영어로 'forgive' 역시 '떨어져서(for) 주다(give)'의 합성어이다. 그래서 피해자가 원하지도 않는 용서는 없다.

행동과 관련된 용서(容恕·Forgiveness)에 있어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한순간의 착각 혹은 실수에 대해서 용서하는 경우를 마주치게 된다.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너그러이 용서를 베풀어준 경우가 많다. 가해자의 간청과 그에 응하는 피해자의 자비심으로 그런 경우가 많으며, 법적으로는 대부분 합의라는 조건으로 용서를 해주는 경우이다. 이 경우의 용서는 부채, 융자, 혹은 다른 모든 요구들에 대해 무죄임을 선언하고 포기하는 법적 용어가 된다.

위스콘신대학교의 국제용서연구소(International Forgiveness Institute)는 최근 어떤 종류의 사람들이 더욱더 용서를 잘하는가를 연구하였다. 그 오랜 연구는 일반적으로 신경질적이며 노여움을 잘 내는 사람들은 오랜 기간이 지난 후에도 다른 사람들보다도 용서하기가 힘들다고 한다. 특히 이러한 사람들은 그들에게 피해를 준 사람을 아예 피하기를 원하고, 일정 시간이 지나면 복수를 원하기도 한다고 한다.

그 연구 결과는 용서를 하는 사람들이 분노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보다 더 행복하고 건강하게 산다고 한다. 사람들이 용서를 할 때 심장 혈관 및 신경계의 기능을 증진시킨다고 한다. 위스콘신대학교의 연구에서는 용서하는 사람들이 질병에도 적게 고통을 겪는다고 한다.

용서가 적은 사람일수록 건강에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쌓여가는 분노의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공격적인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그래서 복수와 같은 부정적인 정서를 미련 없이 버리는 것이 용서라고 한다. 그렇다고 용서는 용납과 다르다.

스탠포드대학교의 프래드 루스킨 박사는 '용서 배우기'(Learning to forgive)라는 저술을 통하여 용서는 용서의 효과를 통하여 학습된다고 말한다.

그는 북아일랜드 분쟁에 의해서 살해된 북아일랜드의 가톨릭과 개신교 가족들을 연구하였는데, 분노를 덜 하고, 상처를 잘 감당하고, 그리고 더 낙관적인 사람들이 여러 상황 속에서 용서를 더 잘하고, 더 동정적이며 자긍심이 많다고 한다.

사과하지 않아도 용서하는 게 진정한 용기라고 어떤 정치인이 말했다고 한다. 그 말이 성립하려면 피해자가 강요된 용서를 하거나, 가해자의 과거 잘못된 행동을 용납할 경우 성립된다. 이는 용서가 아니라 용서를 빌미로 가해를 또 하는 2차 가해이다. 가해자가 정치인이든 재벌이든 예외를 두어서는 곤란하다.

성숙한 사회, 용서는 진정한 반성으로 빛난다. 용서는 해도 잊지는 말아야 한다. 망각은 용서를 왜곡하고 교훈을 묵살한다. 용서해줄 대상이 용서를 빌 마음이 하나도 없고, 가해자가 잘못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는 상태에서는 용서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용서할 대상이 사라진 것이다.

사면론이 많이 나오는 시절에 한마디 했다.

저작권자 © 해남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