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은희(해담은 3차 아파트 공동체 대표)

 
 

요즘 해남읍 해리교 아래가 아이들에게는 핫 플레이스다. 학교는 파했는데 학원이나 방과 후 수업을 가기에는 조금 이른 아이들이 모여 웅성웅성 놀기도 하고 가끔은 가방을 바닥에 내팽개치고 징검다리에서 놀거나 물속에 들어가 이른 물놀이를 한다. 그러나 아이들이 지나간 자리는 처참하다. 때때로 먹고 난 컵라면 용기와 일회용 젓가락이 뒹굴고 과자나 아이스크림의 포장지가 여기저기 나뒹굴기도, 떠내려가기도 한다. 눈에 띌 때마다 야단치며 줍게 하고 마치 해남천이 개인 소유라도 되는 듯이 또 이러면 교장 선생님께 전화할 거라거나 해남천에서 놀지 못하게 할 거라고 엄포를 놓는다.

사실, 실천의 어려움이나 불편함이 혜택을 압도한다면 그 실천의 지속성을 기대할 수 없다. 아이들에게 국물 줄줄 흐르는 컵라면 용기나 쭈쭈바 포장지를 도로 가져가라고 하는 것은 무리이고 대책을 세워야 하는 것은 어른들이다. 그런 무책임한 엄포인데도 아이들은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며 사과하고 친구들과 어울린다.

쉽게 사과하는 아이들이 달포 전의 일을 떠올리게 했다. 아파트는 하루 내내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고도 생활이 가능한 데 지속되면 독이 된다. 밖에 나갈 이유로 요가원에 등록했다. 일 년을 다니면서 새로운 친구들도 만나고 좋았다. 그러나 강습료를 내는 수업은 자유롭게 게으름을 피울 수 있어 강습료 절반의 횟수도 채우지 못했다. 때마침 지역신문에 우유 배달원을 구한다는 광고를 보고 전화를 걸었다.

주 3회, 새벽 4시 전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텀블러에 커피나 물을 준비해서 갔다. 면지역이었는데 배달할 집이 50호도 채 되지 않아 한 달 급료도 40만원 안팎이었다. 첫 한두 달은 우유 크기며 종류, 그리고 배달 개수를 익히느라 세 시간 정도 걸렸는데 돌아오면 온몸이 아팠다. 추운 겨울을 지나면서 같은 길을 두 번 거치지 않게 루트를 개발하고 새벽 하늘을 쳐다보는 여유가 생기며 시간도 앞당길 수 있었다.

배달을 하지만 고지서를 돌린 직후 현금결제를 하는 댁은 수금도 했는데 그날이 그런 날이었다. 툇마루에 고지서와 지폐가 놓여 있었다. 다른 날과 달리 그날은 가로등 불빛에 지폐를 비춰봤다. 만원권 1장과 천원권 2장이었다. 고지서 뒷면에 몇 자 적어 그대로 두고 왔다.

저녁밥을 준비하는데 600원만 두고 가면 되는데 1만2000원을 두고 갔다고 해서 다녀왔다며 대리점에서 전화가 왔다. 자초지종을 얘기했더니 그 후 도리어 화를 내며 나쁜 사람이라 했다는 전화가 왔다. 그래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실수이고 확인을 해보면 금방 풀릴 테니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이틀이 지난 후 배달을 마치고 돌아와 보니 확인하지 않은 문자가 있었다. 보낸 시간이 새벽 5시였는데 오해가 풀렸으니 나머지 대금 받아가라는 연락이 왔다는 내용이었다. 늦게 봐서 아쉽기는 했지만 오해가 풀려 기분은 좋았다.

그런데 그 직후, 그 어르신 댁 배달이 다른 사람으로 교체되어 있었다. 이유를 물어보니 얼굴 보기 불편하다며 우유를 끊는다고 해서 할 수 없이 그랬다고 했다. 소소한 다른 이유도 있지만 미안하다는 진심 어린 사과는커녕 불편함을 대신하기 위해서 또 다른 갑질로 대응을 한 어르신에게 실망하여 16개월 한 우유배달을 그만두었다.

그 후 주위를 살펴보면 유독 사과하는 어른이 사라지고 있는 것 같다. 사과하면 지는 것이라고 인식하는지 변명하거나 도리어 화를 내는 모습을 자주 본다. 진심 어린 사과를 할 줄 알아야 사과하지 않을 삶을 살 수 있다. 해리교 아래에서 꼬맹이들에게 사과의 말을 들을 때마다 스스로 묻는다. "너는 어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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