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출간된 '만약에 한국사'(김연철 등 4인 공저)는 100년의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장식한 34건의 결정적인 순간에 가정법을 대입해 '가지 않았던 길'을 묻는다. 저자는 역사에 가정은 부질없다지만 우리가 갈 길을 내다보는 데 중요한 의미를 던져줄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책은 '5·16 군사 쿠데타가 불발되었다면', '일본에서 납치된 김대중이 암살됐다면' 등의 역사적 사건과 이슈를 다뤘다. 저자는 '김재규가 박정희를 쏘지 않았다면', 즉 10·26 사건이 없었다면 부마항쟁이 엄청난 유혈참극으로 끝나고 대대적인 국민적 저항에 부딪혀 유신체제가 몰락의 길을 걸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5월 21일자 해남신문에 '義士 金寧 金載圭 將軍 追慕 四一週忌'(의사 김녕 김재규 장군 추모 41주기) 제하의 광고가 실렸다. 김재규는 해남 출신도, 해남과 인연이 있는 인물도 아니어서 독자들은 다소 생뚱맞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본관이 김녕인 김재규는 경북 선산군(현 구미시) 출신으로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10·26 사건(1979년)의 주역이다. 당시 권력의 핵심 자리인 중앙정보부장(현 국가정보원장)의 그가 동향 선배인 박정희를 시해한 것은 우리나라 현대사의 물줄기를 완전히 바꿔놓은 일대 사건이다. 그는 신군부에 의해 체포된 후 내란목적살인 및 내란미수죄로 사형선고를 받고 5·18 당시 광주학살이 한창 진행되던 1980년 5월 24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 광고는 충남 부여 출신으로 11년 전 해남 삼산에 정착한 김덕정(76)씨가 의뢰했다. 그는 김재규의 문중 손자뻘로 5년 전 집 인근에 김재규 추모비도 세웠다. 건설부장관으로 있던 김재규를 1976년께 종친회 사무실에서 만나고, 이후 마음의 빚을 안고 있다고 했다. 이를 떠나서 '10·26 사건'이 김재규의 사욕(私慾)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신념을 갖고, 이를 널리 알리고 싶기 때문이라고 했다. '野獸(야수)의 心情(심정)으로 維新(유신)의 心臟(심장)을 (쏘았다). 국민 여러분 自由民主(자유민주)를 마음껏 누리십시오. 저는 먼저 갑니다'라는 광고 문구는 김재규의 법정 최후 진술과 마지막 말이다.

김재규와 10·26 사건의 역사적 평가는 아직 내려지지 않았다. 4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지만 여러 시각이 공존한다. 한쪽에서는 '독재자를 처단한 의인(義人)'이라고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대통령 시해범, 반역자'라고 부른다. 다만 김재규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점차 힘을 받고 있다. 김수환 추기경은 생전에 "더 큰 희생을 막은 정의로운 행동"이라고 표현했고, 고 윤보선 전 대통령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안중근 의사와 마찬가지로 봐야 한다"고 했다. 광주·전남 민주인사들의 모임인 송죽회는 1989년 그의 묘소(경기도 광주)에 '義士 金載圭 將軍 追慕碑'(의사 김재규 장군 추모비)를 세웠다. 국방부 차원에서 부분적이나마 복권작업도 이뤄졌다. 김재규가 복무했던 육군 3군단과 6사단의 역대 지휘관 목록과 사진이 40년만인 2019년 부활한 것이다.

10·26 사건이 없었다면 5·18 광주항쟁도, 대통령 전두환과 노태우도 없었을 것이다. 지나친 가정이긴 하지만 박정희가 평생 대통령을 해먹은 후 북한처럼 세습에 나설 수도 있다. 전국적인 저항과 이에 따라 수많은 국민이 희생되는 수순을 밟았을 가능성도 있다. 역사에 '만약'을 넣는다는 게 무의미하지만, 만일 10·26이 없었다면 전쟁 못지않은 끔찍한 내란도 배제하기 어렵다. 다만 가지 않은 '만약의 역사'는 부질없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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