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이맘때 해남 마산의 한적한 시골 도로에서 교통사고가 발생했다. 50대 남편이 자신이 몰던 승용차로 아내의 차를 정면충돌해 아내를 숨지게 한 사고였다. 광주지법 해남지원은 지난달 남편에게 살인죄를 적용해 징역 20년을 선고했다. 이들 부부는 당시 아내가 이혼소송을 제기한 상태에서 3개월 가까이 별거 중이었다. 남편은 상습 폭행 등으로 법원로부터 접근금지 명령을 받았으나 아내를 설득하기 위해 여러 차례 만나려고 했다.

사고 당일에도 헛걸음을 하자 잔뜩 화가 난 상태에서 운전대를 잡은 뒤, 마침 맞은편 차선에서 낯익은 아내의 승용차를 보고 시속 121㎞(규정 속도 50㎞)로 돌진했다. 20년 이상 함께 살아온 이들 부부가 비극으로 결말을 맺은 데는 사랑이란 원래 자리에 분노나 원망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우리는 친족의 가깝고 먼 관계를 촌수로 매긴다. 부모와 자녀 사이는 일촌, 남매지간 이촌, 부모의 남매를 (외)삼촌이라 부르는 식이다. 부부 사이는 0촌, 무촌이다. 부부는 촌수가 없을 정도로 가장 가깝다. 그래서 일심동체(一心同體), 천생연분(天生緣分·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라고 한다. 불교에서는 천생연분(千生緣分), 즉 1000번 생의 인연이 부부로 이어진다고 한다. 육십 평생을 따져보면 6만 년에 걸친 인연이 바로 부부이다.

'무촌'인 부부도 갈라서면 촌수 자체가 사라져 멀고도 먼 남남이 된다. '황혼이혼'(黃昏離婚)이라는 말이 있다. 흔히 60대 이상의 이혼을 일컫는 말이지만, 넓은 의미로는 20년 이상 부부로 살다가 헤어진 경우를 말한다. 이때는 자녀가 성인이 되고, 그래서 자녀 뒷바라지에 대한 책임이 어느 정도 해소되는 시기이다. 이와 비슷한 졸혼(卒婚)도 있다. 이혼 도장만 안 찍었을 뿐 서로 관여하지 않고 따로 사는 '무늬만 부부'이다.

지난해 우리나라 이혼건수의 37.2%가 황혼이혼이라는 통계가 있다. 전체 이혼이 줄었는데도 황혼이혼은 늘어났다. 전남지역도 별반 다르지 않다. 지난해 도내 전체 이혼건수(3907건) 가운데 20년 이상 함께 살다가 헤어진 황혼이혼(1372건)이 35.1%를 차지했다, 10년 전(4326건 중 922건)의 21.3%보다 크게 치솟았다. 이는 평균 이혼연령(남성 49.2세, 여성 44.6세)을 10년 새 5세 가까이 오르게 한 요인이 되었다. 이를 두고 전문가들은 평균 수명이 증가하고, 코로나19에 따른 '집콕'이 부부간 다툼을 늘어나게 한 요인이 됐다고 진단한다.

여성이 주로 이혼 서류를 내미는 것을 보면 또 다른 이유가 있을 것 같다. 평생 남편에게 억눌린 삶에 대한 보상심리, 재산분할에 따른 경제력, 사회적 지위 향상 등이다. 동창모임에 다녀온 아내가 시무룩하자 남편이 이유를 물었다. "혼자 사는 친구들이 부러웠다"는 말이 되돌아온 것이다.

오늘(21일)은 부부의 날이다. '둘(2)이 하나(1)가 된다'는 의미로 2007년 법정기념일로 제정됐다. 부부의 소중함을 다시금 되새기고 가정의 해체도 막자는 취지이다. 이는 역설적으로 '위기를 맞는 부부'를 의미하기도 한다.

20여년 전, 유럽에서 손을 맞잡고 산책하는 나이 지긋한 부부 모습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는 나란히 걷는 노인 부부를 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효자도 악처만 못하다', '옷은 새 옷이 좋고 임은 옛것이 좋다'라는 우리 속담이 있다. 유대인의 지혜가 담긴 탈무드는 '인생에 있어 가장 소중한 것은 늙은 배우자'라고 했다. 가끔 결혼 당시의 초심으로 되돌아가고 힘들 때는 귀머거리, 장님도 되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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