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해남 출신인 시인 김준태는 광주에 있는 전남고에서 독일어 교사로 근무 중이었다. 18일부터 시작된 광주항쟁이 이틀째 접어든 19일, 그는 마지막 수업을 하고 있었다. 광주는 이미 유혈이 낭자했고, 정상 수업은 불가능했다.

'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던 나는 1930년대 이베리아반도에서 터져 나왔던 스페인 내전을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그때 총살되어버린 시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를 떠올렸습니다. '로르카, 로르카!'를 마음속으로 불러내면서, 로르카의 '달이 떠오를 때'라는 시를 스페인어와 영어, 그리고 우리말로 옮겨 칠판 위에 쓰고 아무 말 없이 교정을 빠져나왔습니다.' (김준태 문학평론집 '5월과 문학' 중 발췌)

'달이 떠오를 때/종들은 죽은 듯이 매달려 있고/헤아릴 수 없는 수 많은 길들이/비로소 나타나 보이는구나/달이 떠오를 때/ 바다는 뭍으로 둘러싸이고/찬 가슴은 망망대해의 성처럼/울먹거리는구나/…/달이 떠오를 때/일백의 똑같은 얼굴을 가진 달/온갖 동전 부스러기들도/주머니 속에서만 흐느끼는구나'

김준태는 광주가 피바다, 불바다가 된 그 시간, 왜 로르카를 떠올렸을까. 로르카를 죽음으로 몰아간 스페인 내전과 광주 학살에서 어떤 유사성을 보았을까. 스페인 내전은 군부, 지주 등 국가주의자들과 중산층, 노동자 등 공화파 간의 내전이었지만. 국제전 성격도 강했다. 파시스트 국가인 독일과 이탈리아는 국가주의자편에, 어니스트 헤밍웨이나 조지 오웰 같은 양심적 지식인들은 국제여단을 구성해 공화파를 지지했다.

로르카는 프란시스코 타레가의 기타곡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으로 유명한 스페인 그라나다 출신이다. 내전 초기인 1936년 8월 19일 새벽, 38살의 시인은 아름다운 고향의 올리브나무 밑에서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총살당했다.

김준태는 이날 마지막 수업을 끝으로 교직에서 쫒겨났다. 그의 유명한 5·18 시,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가 당시 한 신문에 실리면서 그 대가로 해직됐다.

또 다른 해남 출신 시인 김남주(1946~1994)는 5·18 당시 옥중에 있었다. 그는 1978년 터진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사건으로 징역살이 중이었다. 그의 '학살 2' 중 일부다.

'오월 어느 날이었다/80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광주 1980년 오월 어느 날 밤이었다/…/밤 하늘은 핏빛의 붉은 천이었다/밤 12시 거리는 한 집 건너 울지 않는 집이 없었고/무등산은 그 옷자락을 말아 올려 얼굴을 가려 버렸다/…/아, 게르니카의 학살도 이렇게 처참하지는 않았으리/아, 악마의 음모도 이렇게는 치밀하지 않았으리'

반 유신 활동으로 감옥살이를 시작한 이 여린 시인은 모진 세월을 만나서인지 어느 순간 시인이라기보다는 전사가 됐다. 그는 1988년 12월 석방되어 결혼하고 자식을 낳아 잠시 보통 사람의 삶을 사는가 싶다가 1994년 고문 후유증으로 생을 마감했다.

해남은 우리나라 시문학의 일번지로 꼽힌다. 광활한 들판과 풍족한 물산, 수려한 산과 바다는 수많은 시인들의 시심(詩心)을 불러일으켰다. 그런 의미에서 고정희(1948~1991)를 빼놓을 수 없다.

고정희는 우리나라 페미니즘 문학의 선구자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녀는 1991년 지리산 등산 중 실족, 43년의 짧은 생을 마친다. 그녀의 5월 시 '그날을 모른다 말하리'를 소개한다.

'넋이여/망월동에 잠든 넋이여/…/누가 그날을 잊었다 말하리/누가 그날을 모른다 말하리/…/목숨 바친 역사 뒤에 자유는 남는 것/시대는 사라져도 민주꽃 만발하리/나 떠난 길 위에 통일의 바람 부니/ 겨레 해방 봄소식 눈물이 나네'

또다시 5월이다. 5월은 어김없이 왔지만 5·18은 여전히 '미완'(未完)의 딱지를 떼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고 실망하지 말자. 조금 더디더라도 역사는 전진하고, 정의는 승리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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