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라는 이름의 딸을 둔 지인에게 무슨 사연이 있느냐고 물었다. 들녘에 펼쳐진 푸른 보리밭의 풍경이 가슴을 확 트이게 하면서 서정적인 분위기에 흠뻑 빠진 적이 있다고 했다. 이때 감동이 첫째 아이 이름을 무조건 '보리'로 작정하게 했다는 것이다. 그 딸은 지금 '들녘의 보리밭과 동떨어진' 서울에서 의사의 길을 걷고 있다.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뉘 부르는 소리 있어 나를 멈춘다/옛 생각이 외로워 휘파람 불면/고운 노래 귓가에 들려온다/돌아보면 아무도 보이지 않고/저녁놀 빈 하늘만 눈에 차누나' 1953년 발표된 가곡 '보리밭'(윤용하 작곡, 박화목 작사)이다. 이 노래는 두 사람이 살벌한 전쟁통(6·25)에서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희망과 서정을 안겨주고자 의기투합해 만들어졌다.

요즘 해남 들녘에선 거센 바람 너머로 보리 영그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보리는 홀대의 대명사가 되어 버린 지 오래지만 해남은 여전히 최대의 주산지이다. 올해 해남에서 재배되는 보리 면적은 4000ha 남짓. 이는 전남의 20% 정도, 전국의 10% 가까이 차지한다. 지난해 10월 말~11월 초 마산, 황산, 계곡, 옥천 등의 들녘에 파종된 보리는 유난히 추웠던 겨울을 넘기고 다음 주부터 수확에 들어갈 것이다. 정부 수매는 10년 전 사라졌고, 농협 수매나 정미소와 계약(흑보리)한 일부는 사정이 괜찮지만 대부분 농가에서는 재고가 쌓인 채 맞이한 수확철이 마냥 반갑다고 할 수 없는 처지이다. 농가마다 알음알음으로 처분해야 하기 때문이다.

보리는 인류가 수렵생활을 끝내고 정착의 길로 들어서게 한 농경시대의 첫 번째 작물로 꼽힌다. 중동의 메소포타미아에서 9000~1만 년 전 재배를 시작했고, 우리나라에도 3000년 전인 기원전 1000년께 전파된 것으로 추정된다. 보리의 어원(語源)은 정확히 밝혀진 게 없으나 우연인지 영어(barley, 바알리)와 엇비슷하다.

1960년대까지 이어졌던 배고픈 시절을 빗댄 '보릿고개'라는 말이 있다. 가을에 추수한 곡식이 다 떨어지고 햇보리가 나올 때까지 4~5월의 춘궁기를 이른다. 이런 유래가 전해진다. 262년 전인 1759년, 조선 영조의 새 왕후를 간택하는 면접시험에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고개'라는 질문이 던져졌다. 나중에 정순왕후가 된 15세 처녀가 '보릿고개'라고 답했다. 이유는 이랬다. 보리 이삭이 여물기 전 식량이 다 떨어질 때가 농부들에게 가장 힘든 시기이다. 이때의 보릿고개가 가장 넘기 어려운 고개라는 것이다. 보릿고개는 말이 생기기 이전은 물론, 이후 200년 이상 민초에게 해마다 찾아오는 숙명 그 자체였다.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말도 보릿고개를 넘으면서 거친 음식이 변비로 이어지고, 그래서 항문이 찢어진 데서 유래했다.

'아야 뛰지마라 배 꺼질라/가슴 시린 보릿고개 길/주린 배 잡고 물 한 바가지 배 채우시던/그 세월을 어찌 사셨소///' 가수 진성이 어린 시절을 회고하며 노랫말을 직접 지어 2015년 발표한 '보릿고개'이다. 그는 1960년 전북 부안에서 태어났으니, 60년대 후반 연이은 흉년으로 가장 힘든 시절을 보냈을 것이다.

'보릿고개'가 떠나간 자리에 불청객인 '코로나 고개'가 들어앉았다. 코로나19는 1년 넘게 우리 주변에 똬리를 틀며 좀체 떠나지 않는다. 모두가 보릿고개처럼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지만, 영세 자영업자에게 말 그대로 죽을 맛이다. 코로나 고개를 넘어가더라도 예전으로 돌아간다는 보장이 없다. 부대끼며 살아가는 게 삶인데, 그게 사라질까 걱정이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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