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한 공중파 방송 예능 프로그램에 외국인의 눈에 비친 우리나라의 '빨리빨리 문화' 로 세 가지 사례가 소개된 적이 있다.

자판기에 손 넣고 기다리거나 승강기 닫힘 버튼 계속 누르기는 흔히 예시되곤 한다. 또 하나로 소개된 게 카드 결제 서명을 대신하는 것. 외국인에게 급하거나 단지 귀찮다는 이유로 하는 대리 서명이 꽤 이상하게 보인 모양이다. '빨리빨리'는 우리나라에 온 외국인이 가장 먼저 배우고, 해외 관광지에서도 현지인이 가장 잘 알아듣는 한국말이라고 한다. 입에 달고 살아왔기에 이런 이야기가 나왔을 것이다.

'빨리빨리'는 조급성과 부지런함을 함께 내포하고 있다. 사실 우리 민족성은 그리 조급하지도, 부지런하지도 않았다고 봐야 한다. 선비정신을 앞세워 유유자적과 느림(게으름이 아님)을 미덕으로 삼았다. 또한 부지런한 민족이었다면 '찢어지게' 가난한 삶을 반만년에 걸쳐 대대손손 유산으로 남겨주지 않았을 것이다. '코리안 타임'(Korean time)도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시간관념이 부족한 한국인을 비꼬아 부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빨리빨리 문화'는 60~70년대의 급격한 산업화 과정에서 수십 년간 우리의 정신세계를 지배했다. 그래도 이게 지금의 한국이 유사 이래 가장 잘사는 시대로 접어들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하지만 '빨리빨리 문화'에서 조급함을 방점에 둔다면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사람은 뒷전에 밀리고 자동차를 앞세운 잘못된 교통정책이 그것이다. 길의 원래 주인은 사람인데, 그 길을 자동차에 내어주도록 한 것이다.

도로교통법은 횡단보도와 보행자 횡단을 이렇게 규정해놓고 있다. '횡단보도란 보행자가 도로를 횡단할 수 있도록 안전표지로 표시한 도로의 부분을 말한다'(제2조 12항), '운전자는 보행자가 횡단보도를 통행하고 있을 때에는 일시정지하여야 한다'(제27조 1항) 근데 법 조항을 꼼꼼히 살펴보면 교통약자인 보행자는 생명을 담보로 눈치껏 길을 건너야 한다. 운전자가 일시 정지를 하지 않을 경우에는 어쩌란 말인가. 도로는 사람이나 차마(車馬)가 다니는 길이지, 차만 다니는 차도가 아니다. 그래서 이렇게 바꿔야 한다. '사람이 횡단보도를 건너기 위해 기다리고 있으면 운전자는 정지해야 한다'라고.

해남군청 뒤편 왕복 2차선 도로는 해남읍에서 차량 통행량이 가장 많다. 출퇴근 시간대에는 사람이 차량 간격을 뚫고 건너야 할 틈새가 좀체 나지 않는다. 신호등 없는 이곳 횡단보도를 건널 때마다 신변의 위협을 받는다. 건너려고 기다리는 보행자를 위해 멈추는 차량을 여태껏 본 적이 없다. 법마저 건너고 있는 사람이 있어야만 일시 정지하라고 되어있는데, 뒤따라오는 차량 눈치도 봐야 하는 운전자가 일단 멈춤을 하겠는가.

'안전속도 5030'이 지난 17일부터 전국에서 전면 시행됐다. 서울·부산 등은 이미 단속에 들어갔고, 준비가 덜 된 지역은 7월부터 단속에 나선다. 골자는 도심부의 일반도로 제한 속도를 50㎞, 스쿨존을 비롯한 이면도로는 30㎞로 낮춘 것이다.

시행 초기에 운전자는 답답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운전자도 차에서 내리는 순간 보행자가 된다. 지난해 우리나라 교통사고 사망자 3081명 가운데 길을 걷다가 차에 치여 숨진 사람이 35%인 1093명에 달했다. 이제 도로의 주인 자리를 사람에게 돌려줘야 한다. 사람이 죽어 나가는 판에 차량 위주의 교통문화는 더이상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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