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평호(농부)

 
 

2020년도에 한국의 고령화 진도가 일본을 추월했다고 한다. 수도 서울의 고령화 비율도 이미 심각한 상태이다. 시골은 대부분 50%에 육박하는 고령화 비율을 보여준다. 만 65세 이상을 고령이라고 한다. 노인, 언제부터인가 우리에게 혐오적인 냄새를 풍기며 자리 잡고 있다. 오래된 지혜를 가진 현인이자 마을의 어른이라는 이미지를 잃고, 늙은이 혹은 꼰대라는 모습으로 다가서고 있다. 사회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걸림돌의 중추 역할(?)을 마다하지 않고 있다.

고령사회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슬픈 사회인가. 행복한 사회인가. 마을의 어른이 사라진 곳에 온갖 재물과 제도가 복지의 이름으로 빈틈을 메꾸고 있다. 엉성하기 짝이 없는 제도에 서로가 뒤엉켜 살아가고 있다. 그러다 보니 요양원은 노인들에겐 고려장 같은 공포의 대상이 된 지 오래다. 사람은 고쳐 쓰지 못하지만, 사회는 고쳐 쓸 수 있다고 한다. 사람이 늙어간다는 것, 단순히 나이를 먹어 가는 육체적 늙음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준비 과정이라면, 이는 삶의 저주이다. 늙음이 고통이라면 삶은 평생 고통을 준비하는 과정일 터이다. 늙음이 잘 익어가는 삶의 길이라면 행복의 완성이리라.

늙어가는 사람과 익어가는 사람은 삶의 방식이 딴 판이다. 늙어가지 않고자 불로장생초를 찾아 구만리 세상을 뒤졌다는 진시황도 늙음 앞에는 무기력했고, 몸서리치게 늙음을 거부했던 그의 죽음과 함께 그가 이룬 중국 최초의 통일제국도 순식간에 무너졌다. 늙어감을 즐겼던, 아니 잘 익은 사과처럼 맛있게 삶을 즐기다 떠난 현인들은 묘비명을 재미있게 남겼다.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천상병)

'나보다 현명한 사람들을 주위에 모으는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 여기에 잠들다'(카네기)

'썼노라, 살았노라, 사랑했노라'(스탕달)

'나는 모든 것을 갖고자 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갖지 못했다'(모파상)

'왔니? 고맙다, 사랑한다. 행복해라'(무명씨 부부)

'지금까지 살게 해주어서 고마워요'(무명씨)

'날아다니는 것이 멋진 삶이 아니고, 아픔 없이 걸어 다닌 것이 멋진 삶이라오'(무명씨)

오래된 사고와 개혁 없는 질서를 선호하는 사회, 늙어가는 사회이다. 노인들이 사회의 걸림돌이 되는 순간, 그 사회는 미래가 없이 늙어가는 사회이다. 노인 세대가 미래 세대의 길잡이가 아니라 방해꾼이자 고집쟁이가 된 사회는 병든 사회이다. 아집과 완고한 사상에 빠져 군대처럼 사회 구성원들이 모두 오직 한길로만 가길 바라는 노인들, 그리하여 끝까지 모든 걸 누리면서 키를 놓지 않고 무덤까지 들고 가려는 그들의 모습은 추하기 짝이 없다.

익어가는 사회, 그것이 진정 상쾌한 사회이다. 잘 익은 이의 삶은 끝, 간데없이 퍼지는 멋진 향기이다. 자신을 낮추어 겸손을 몸소 실천하면서 이웃들과 함께 가는 길을 걸어가는 어른이야말로 우리의 귀감이다. 재물은 순간의 행복을 포장하다 말지만, 재물의 굴레를 벗어던진 삶은 끝없이 자연스러운 행복을 준다.

머리에 감투를 맞추어야 머리도 감투도 제 기능을 한다. 우리 주변에는 능력과 상관없이 감투 크기에 머리를 맞추는 일이 많다. 자기 자신의 능력을 벗어난 자리를 탐하는 이들이 많다. 늙음이 또는 젊음이, 심지어는 보수나 진보가 무기가 되어 자리를 차지하고 억지를 부리는 모습의 감투는 사회를 병들게 하는 완장이다. 소통이 막힌 세대는 썩은 사과나 다름없다. 애국을 무기로 태극기를 흔드는 노인들, 그들의 애국은 완고한 사상이 망령이 된 타령이다. 자유분방을 무기로 영혼까지 모아서 주식 투자한다는 젊은이들, 그들의 투자는 이기적 가치가 타락한 청춘의 몰락이다. 나는 그저 노인인가. 고령화 사회, 늙은이 젊은이 할 것 없이 잘 익어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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