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름은 영남, 바둑은 호남' 이라는 말이 있다. 60~70년대 모래판을 주름잡은 김성률(작고), 80년대 출범한 프로씨름계를 '이만 가지 기술'로 호령한 이만기, 혜성같이 나타나 전성기에 돌연 은퇴, 예능 분야로 행로를 바꾼 강호동이 모두 영남이 낳은 걸출한 씨름선수이다.

우리나라 바둑은 해방 이후 70년 이상 5명의 호남 출신이 1인자 계보를 이어왔다. '한국바둑의 아버지' 조남철(부안), '영원한 국수' 김인(강진), '바둑황제' 조훈현(영암), '돌부처' 이창호(전주), '천재 소년' 이세돌(신안)이 차례로 세대교체의 기수가 되었다.

'프로 바둑기사 1호'인 조남철은 잡기나 도박 정도로 치부되던 바둑을 지금의 위상으로 끌어올린 현대바둑의 개척자이다. 당시 "조남철이 와도 안돼"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20년간(해방 직후~60년대 중반) 독보자로 군림했다.

조남철의 철옹성은 스무 살 아래인 김인이 등장하면서 무너진다. 1965년 국수전을 시작으로 '10년간 30개 타이틀'을 거머쥔다. 40연승 대기록도 보유하고 있다. 국제 바둑대회의 단골 선수단장을 맡은 김인은 지난 3일 78세의 일기로 타계했다. 장례는 조남철에 이어 두 번째로 한국기원장으로 치러졌다.

김인 시대는 열 살 아래인 조훈현에 의해 막을 내린다. 여전히 세계 최연소 기록인 '아홉 살 입단'의 조훈현은 세 차례 전관왕 등 160차례 타이틀을 획득한 바둑계의 살아있는 전설이다. 세계바둑 월드컵이라는 1회 응씨배(1989년)에 단기필마(單騎匹馬)로 출전해 우승함으로써 최강의 한국바둑을 세계에 알렸다. 귀국한 김포공항에서 프로기사에게 전무후무할 뿐더러 국가 주도의 마지막 카퍼레이드가 펼쳐지기도 했다. 통산 1955승으로 2000승 고지에 45승을 남겨두고 있다.

조훈현의 20년 아성은 스물두 살 차이인 내제자(內弟子) 이창호에 의해 흔들린다. 주로 일본에서 일컫는 내제자는 스승의 집에 기거하며 바둑을 배우는 제자로 일종의 문하생이다. 이창호는 내제자가 된 지 6년 만인 15세에 최고위 타이틀을 시작으로 스승의 영토를 차츰 잠식해나간다. 모두 312차례 공식 사제대결을 벌여 192번 이긴다.(승률 61.5%) 17세에 세계기전(동양증권배)에 우승하며 기네스북에 '최연소 세계챔피언'으로 등재되기도 한다.

이창호가 누린 15년간의 왕좌는 여덟 살 아래인 이세돌에게 넘어간다. 이세돌은 난전과 화려한 전투를 앞세워 국제기전에서 18차례 우승하고, 인공지능 프로그램 알파고의 72전 중 유일하게 1패를 안긴 기사로 남아 있다. 호남 출신으로 이어진 1인자 계보가 이세돌을 끝으로 막을 내릴 조짐이다. 지금은 '신·박'(부산 출신 신진서, 서울 출신 박정환) 흐름을 타고 있지만, 절대 강자의 시대는 다시 오지 않을 수도 있다.

바둑은 가로, 세로 19줄이 만나는 361개 착점에 흑백의 돌을 두어 집을 많이 짓는 싸움이다. 유사 이래 똑같은 내용의 바둑은 없다고 한다. 경우의 수를 따지면 361×360×359×…×1이다. 사실상 무한대(1.4×10의 768승)인 이 셈법에 패싸움은 반영되지 않았다. 바둑 용어는 일상에도 많이 녹아있다. 악수, 묘수, 자충수, 노림수, 속임수, 승부수, 꼼수, 포석, 국면, 미생, 호구, 대마불사 등등.

바둑의 열 가지 교훈(십계명) 가운데 사소취대(捨小就大·작은 것은 버리고 큰 것을 얻음)라는 게 있다. 소탐대실(小貪大失)을 경계하라는 내용이다. 인생의 축소판인 바둑은 마음에 새겨둘 많은 가르침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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