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두(문학평론가·인송문학촌 토문재 촌장)

 
 

문학을 전공하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내 삶의 현실과 암담한 미래에 대한 어떤 두려움이었다. 이런 까닭에 대학의 문창과 시절은 치유의 시간이었다. 곁에서 동고동락을 해준 스물여덟이란 나이에 만난 만학도 후배가 떠오른다. 강의실 맨 앞자리에 앉아 수업을 경청했다. 시론과 시작법 시간마다 항상 교수님께 칭찬을 들었다.

대학을 졸업하고는 시 쓰기를 그만두고 소설을 쓰면서 매년 신춘문예에 도전하지만 낙방했다. 30년이 지나도록 포기를 권하지 못했던 것은 엄마를 찾는 희망이었다. 시인을 꿈꾸는 이라면 지도교수의 칭찬에 당연히 함박웃음을 지어야 할 테지만 그의 표정은 늘 쓸쓸했다. 자신의 작품에 쏟아지는 칭찬을 듣고도 마냥 행복한 웃음을 짓지 못하는 이면에는 가난이라는 슬픔이 도사리고 있었다.

경제력이 없는 시절이어서 학비와 생활비 모두를 누나가 대주고 있었다. 대부분 문학도들은 글 쓰는 것 외에는 돈이 될 만한 다른 일을 할 줄 모른다. 모든 신경을 글쓰기에만 집중하기 때문이다. 고혈을 짜내가며 아무리 좋은 시를 쓴다 해도 아름다운 시 한 줄이 당장 주린 배를 채워주지는 못한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문학을 하는 나와는 달리 이런 후배를 볼 때마다 서정주의 '목화'라는 시가 떠오르곤 했다. '누님. 눈물 겨웁습니다/이, 우물물같이 고이는 푸름 속에/다소굿이 젖어 있는 붉고 흰 木花꽃은,/누님./누님이 피우셨지요?…/'

누님의 눈물을 먹고 자라는 붉고 흰 목화. 아마도 후배의 모습이 이 같지 않을까? 어릴 적 이혼 후 집을 나간 어머니는 행방을 모르다가 근래 그토록 그리워하던 어머님과 상봉했다는 소식을 해남 백련재 문학의 집에서 들었다. 고아처럼 누나와 살았던 세월 탓인지 그리워하던 어머님과의 애정은 어린 남매를 버린 어머니에게 원망도 컸으련만 그의 작품 속에서 묻어나는 어머니를 향한 절절한 그리움은 애달프기만 했다. 빈자리를 채워준 어머니보다 더 큰 사랑을 받았던 것은 누나가 후배의 시 세계 원천이 된 듯했다. 가난이 주는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을 문학에 희망을 걸었지만 금년에도 신춘문예에 낙방하면서 시름에 잠기더니 문학을 접고 닭을 기르는 양계장에서 세월을 견디고 있다. 한국문학의 큰 줄기를 남길 것이라는 예단이 내게는 있었다. 그런 탓에 "용기 잃지 마. 다시 써야지 포기는 있을 수 없는 거냐." 손을 잡아주는 것뿐이었다.

슬픔도 시간에 닦이면 빛이 바래간다. 간절한 후배의 슬픔들이 모여 문장을 토해내리라 믿는다. 그의 누나가 피워낸 붉고 흰 목화는 이제 제 힘만으로 꽃을 피우게 될 것이다. 스스로 피워낸 꽃이 진 뒤에 한 계절 동안 지난한 외로움을 묵묵히 견뎌낸 뒤 후배가 폭신한 목화솜을 만들어낼 수 있기를 기도한다.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며 올곧은 지성인들과 작가들이 직면하는 목소리에 비하면 내 문학은 유약하고 나약할 뿐이지만 후배와 같은 가난한 작가들이 고향 땅끝 해남에 마련한 인송문학촌 토문재(仁松文學村 吐文齋)에서 삶의 가치와 의미를 성찰하는 글을 치열하게 성실하게 글밭을 가꾸며, 아름다운 작품들을 정신의 그믐으로 토해내고 실천할 수 있다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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