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춘(법무법인 클라스 대표 변호사)

 
 

내 고향 집은 계곡면 신평리이다. 대표격인 신평(新坪) 부락을 포함 6개 자연 부락을 묶어 '신평리'라는 행정리가 된 곳이다.

어린 시절 우편 봉투에 주소를 쓸 때는 꼭 마지막에 괄호를 쳐서 내 집이 있던 '해월(海月)부락'이라고 썼다. 강진군의 도암면과 해남군의 옥천면에 접한 변두리여서 교통도 불편하고 전기, 전화 문명의 혜택도 많은 사람들이 믿지 않을 정도로 뒤늦은 곳이다. 하지만 위쪽에 큰 저수지가 있고, 그런대로 넓은 들판이 있으며 작지만 내가 졸업한 초등학교도 있던, 특히 말(馬) 삼아 올라타면서 놀았던 뒷산 중턱의 큰 바위도 있던 아름답고 그리운 곳이다.

선친께서는 평생을 농사일로 보내셨지만 농사일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철을 제외하고는 사서삼경을 곁에 두고 지필묵을 즐기셨다.

우리 집 대들보는 물론이고 인근의 인연 닿는 여러 가옥의 대들보에 상량문 필적을 남기시기도 하였다. 언젠가부터 선친께서 당신이 쓰신 묵서의 말미에 '月新'(월신)이라고 써놓으신 것이 눈에 들어왔다.

생전에 여쭈어보지는 못했으나 내 고향 신평리와 해월 부락에서 연유하였을 것이다. 지금 내 방에 걸어둔 주자의 무이구곡 액자의 묵서는 선친께서 춘추 70에 쓰신 유묵으로, 말미의 월신 낙관을 볼 때마다 선친과 고향 모습을 그려보게 된다.

중학생이 되고부터는 사실상 주된 생활을 외지에서 하였으니 고향 집을 떠난 지도 어느덧 50년이 넘었다. 그 사이 32년간을 법원에 몸담았고, 마지막 보직인 초대 서울회생법원장 임기를 마치면서 법관직을 사직하고 변호사로서 새 출발을 한 지도 2년이 다 되어 간다. 돌아보면 판사 시절에는 사회인이라기보다는 여전히 학생인 듯한 기분을 느낄 때가 많았다.

판사의 삶은 다양한 영역의 많은 사람들과 활발히 교분을 나누는 것과는 맞지 않아서 사회와 떨어져 사건과 기록을 통하여 세상을 배워간다는 생각에 늘 잠기곤 했었다. 그러는 중에도 마음의 부담을 털고 훌륭한 분들과 정담을 나눌 수 있는 자리를 함께 하는 행운도 자못 있었다. 그런 자리에 함께 해주신 분들의 대부분은 어김없이 해남 출신들이었다. 그렇게 뵈었던 선후배님 모두가 큰 성취를 이루신 분들이었다.

해남이라는 공통점 하나로 마음의 벽을 쉽게 허물고 그분들의 대단한 인생 역정과 고향 자랑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그때마다 감사 인사를 제대로 드리지 못하였지만 그 분들의 법관직에 대한 신뢰와 큰 기대야말로 조금씩 생겨나곤 하던 중도 사직의 마음을 멀리 하고 30년 이상의 오랜 기간을 법관으로 봉직할 수 있게 한 큰 힘이었다. 고향의 은덕을 평생 입어 온 것이다. 변호사 생활을 시작하니 해남의 그늘은 더 넓고 짙어진다. 같은 해남 출신이라는 인연으로 어려움을 호소하거나 기왕이면 내게 기회를 주려고 하는 마음이 훤하게 보인다.

삶과 고향과 고향 사람들의 밀접성은 간단하게 표현할 수 없는 것임을 절감한다. 법관직과 달리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주요 일상이 된 지금은 거의 매일 해남과 해남의 훌륭한 분들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더불어 지금은 해남에서조차 잘 사용하지 않을, 우리의 부모님들께서 사용하셨던 '굉기하다' 같은 옛말들을 회상하여 보기도 한다. 그러한 시간들은 매우 유쾌하고 삶에 활력을 불어넣어 준다. 단지 그 뿐이 아니다. 함께 소년 시절로 돌아가는 때이기도 하니 그 시간만이라도 나이를 잊게 된다. 그러면서도 아쉬움 또한 생길 때가 많다. 그런 자리에서는 어김없이 남도의 다른 지역의 부러운 이야기를 함께 나누게 되기 때문이다. 다행히 요즘은 해창막걸리 덕에 자연스럽게 해남 이야기가 많이 나오게 되어 좋다.

사람이 찾는 곳은 이야기가 있는 곳이다. 선친의 상량문이 남아 있는 집들을 찾아보면 좋겠다는 마음을 품었으면서도 아직 실행하지 못하고 있다. 그 길에 고향 해남의 숨은 이야기를 많이 찾아 나누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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