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은희(주부)

 
 

전 세계가 2020년을 온통 코로나19 바이러스에 갇혀 보냈다. 국내에선 작년 2월 코로나 첫 사망자가 발생한 후 11개월 만에 사망자수가 1007명이라는 통계를 실은 기사가 올해 어느 일간지 1면에 실렸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 같은 죽음들이다. 코로나는 우리의 일상 뿐만 아니라 관혼상제의 풍습마저도 바꿨는데 특히 장례문화의 변화는 더욱 안타깝다.

1899년생인 시할머니가 96세에 돌아가셨다. 시집 와서 10년이 채 되지 않았을 게다. 지금의 장례식장과 같은 문화가 없었으니까 꽤 오래 전이다. 동네 사람들은 백수 가까이 살면서 앞세운 자식 없고 후손들도 무탈하니 호상이라며 할머니가 복이 있다고 했다. 실제로 초상집이 울음보다 웃음소리가 더 자주 담장을 넘었다. 집안에서는 동네의 아짐이며, 형님들이 삼삼오오 모여 음식 장만을 하면서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문상객들은 그 자리에 섞여 울다가 웃다가 했다. 밤에는 동네 남정네 뿐만 아니라 이웃 동네 남정네들이 아랫마당에서 윷놀이를 하느라 동네가 떠나갈 듯했다. 그렇게 이틀을 꼬박 보내고 그 다음날 할머니는 꽃가마를 타고 가셨다.

시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20년 후, 83세의 시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여름 지나 가을과 겨울을 보내고 봄에 시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어머니 연세 86세였다. 세상에 남은 자녀들은 부고장을 돌리지 않았어도 소식을 듣고 찾아온 많은 지인들을 정성스레 대접했다. 고인들이 베푸는 마지막 식사이므로. 여기저기서 장례식장으로 찾아온 조문객들이 떠난 밤에는 부모이며 시부모인 동시에 장인과 장모 되는 분들의 이야기를 술 한 잔 기울이며 나눴다. 추억을 공유하며 울다 웃다 서로를 위로하다 장례식장 여기저기에 누워 잠을 청했다.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 목포 추모관, 동네 그리고 선산 장지에서 낮을 보내고 시골집으로 돌아와 다시 저녁이 되면 상복을 벗었다. 그리고 삼우제를 지내고 모두 제각각의 집으로 돌아갔다.

2020년 12월 28일, 향년 83세의 윤상철 회장님이 돌아가셨다는 부음을 남편을 통해서 들었다. 얼마 전 댁으로 병문안을 다녀온 남편은 그래서 더 갑작스러워 했다. 고인은 해남군 농민회 초대 회장이었으며 개인의 희생이 따를 수밖에 없는 그 자리를 두 차례나 더 맡았다.

1990년 9월 1일, 군민회관(현재 해남문화예술회관)은 좌석은 물론 통로도 농민으로 빼곡히 찼고 미처 들어가지 못한 농민들은 로비에서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대화를 나누며 상기되어 있었다. 그마저도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은 군민회관 밖에서 사물놀이 길놀이 패들과 함께 있었다. 드디어 해남군 농민회 창립이 선포되고 해남군 농민회 설립준비위원장이었던 고(故) 윤상철 회장님이 초대 회장이 되었다. 그 후 윤 회장은 붉은 머리띠 질끈 동여매고 농민운동의 최전선에 섰다.

고인(故人)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세상에 드러나지 못하고 고인의 무덤에 갇혔다. 해남군 농민회의 실질적, 정신적인 기둥이며 고귀한 땅의 아들, 농민 윤상철 회장의 부음이 하필 지금이어서 더 안타까운 이유다.

애도하지 않아도 되는 죽음, 이야기가 없는 죽음은 없다. 그런데 코로나는 우리에게서 애도할 자유와 세상에 나와야 할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무덤에 묻었다. 국내외의 많은 코로나 사망자들, 그리고 하필 이 시기에 유명을 달리한 비코로나 사망자들의 죽음과 그들의 숨은 이야기에 애도를 표한다.

고(故) 윤상철 회장님의 명복을 빌며 모든 코로나 시국의 죽음을 애도한다.

저작권자 © 해남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