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정(민예총 해남지회장)

 
 

미황사 초입에 들어서자 여름내 토실한 상수리를 매달았던 참나무가 하나둘 옷을 벗고 싸늘한 겨울바람을 맞고 있다. 달마산도 참모습을 드러낸다. 참나무에 기대 살던 다람쥐와 청설모는 두 볼 미어지게 상수리를 물어 날라 곡간을 채웠으리라. 나무를 떠난 갈색 이파리들은 바람이 향하는 대로 쓸려가고 있었다. 속세에 부는 바람이나 산중에 부는 바람이나 그 속성은 별반 다르지 않은가보다.

서리 내린 뒤 국화처럼 목소리 키우지 않아도 은은한 향기로 자리하고 있는 게 미황사요, 달마산이다.

"금강 스님이 미황사를 떠나게 됐다는데, 이 일을 어째야 쓰까이? 뭔 대책이 없으까?"

"이 사람아, 금강 스님은 산이여, 그것은 달마산이 통째로 없어지는 것이여."

읍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허탈한 마음에 주지 임면권을 쥔 대흥사 쪽을 바라보며 언성을 높이기도 했다. SNS에도 온통 금강 스님 이야기였다. 이렇게 보낼 수는 없다고 시민단체도 나서면서 대대적인 서명운동을 시작했다.

미황사는 항상 열려 있었다. 예술인들을 받아들여 산사에 음악소리가 울렸고, 그림이 걸렸고, 조각이 전시됐으며, 신영복 선생님 같은 우리시대 훌륭한 스승들의 강의가 이어졌다. 전국에서 지구촌 곳곳에서 '참나'를 찾아 행복하게 살고 싶은 사람들의 참선수행의 발길이 이어졌다. 이는 금강 스님의 문화적 안목과 모든 존재와의 깊은 교감이 빚어낸 결과였다. 종교에 무감했던 내가 그나마 절과 친숙해진 것은 금강 스님 덕분이었다.

정월이면 바닷가 마을의 도제를 주관하며 어부와 농부들의 안녕을 기원했고, 서정분교를 살리고, 진도 팽목항에서 죽은 자들과 산자들을 돌보며 종교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를 알게 해주었다. 낮은 세상으로 내려와 시린 손 넉넉히 잡아주었던 게 미황사요, 금강 스님이었다. 그리고 음으로 이런 미황사의 기반을 조성한 것이 현공 스님이었다.

90년대까지만 해도 미황사는 겨우 대웅전 하나 남아 있는 보잘 것 없는 절이었다. 그곳에 금강 스님과 현공 스님이 내려와 불사를 일으키고, 벗겨진 단청에 문화의 빛을 입혀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금강 스님은 사람들에게 차주지, 재워주지, 먹여주지, 감 따주지, 법문해주지, 운전해주지, 구경시켜주지, 안내해주지 등 할 수 있는 모든 걸 주는 우리들의 주지였다.

그렇게 우리들에게도 자신처럼 또 다른 이들의 주지가 되기를 바랐다.

불교계의 문중 문제까지 개입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산중에 있는 절이라고 다른 세상일까. 굳이 불교의 연기설을 들먹이지 않아도 대흥사도, 미황사도, 해남군민도 서로 엉겨 더불어 사는 세상이다.

부처님이 어지러운 세상에 스님들을 보낸 것은 아픈 대중의 마음을 치유하라는 것 아니었을까. 정치판과 똑같이 이해관계와 파벌이 존재하는 곳이라면 굳이 절을 찾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무소유를 실천했던 법정 스님이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은 무엇인가? 진흙탕 속의 대중들이 청정한 연꽃을 바라보는 것은 그 다름 때문이다. 그것은 사람들을 향해 핀 꽃이다.

금강 스님을 붙잡고 싶은 것은 속세인의 미련인지도 모르겠다. 절 안의 힘의 구조를 너무도 모르는 바보 같은 생각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미황사가 지금의 미황사가 되기까지는 금강 스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모든 권위를 내려놓고 차 한 잔 내려주며 넉넉히 아픈 마음을 어루만져주던 그 천진한 웃음이 있었기에 사람들의 발길 이어지는 땅끝 아름다운 절 미황사가 되었던 것이다.

"중에게 집이 어디 있나요. 바람이 불면 그 바람 따라 가는 게 중이지요." 언젠가 금강 스님이 내게 했던 말이다. 참나무 이파리 쓸어가는 그 바람이 부는 모양이다. 내년에도 미황사 참나무는 다람쥐, 청설모를 넉넉히 불러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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